시어머님은 밥 먹이는 것을 좋아하셨다. 시어머님이 오시면 언제나 밥 먹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났다. 어머님이 떴다 하면 맏이인 우리 내외는 서울역으로, 버스 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다.

아버님과 함께 오시는 어머님을 모셔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어머님이 가져오시는 열댓 개가 넘는 보따리를 실어 와야 해서이다. 고추장, 된장, 마늘이며 갈치, 병어, 홍어, 조기 등 생선과 김, 미역, 감태, 젓갈…장아찌, 나라스께…. 목포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아마 죄다 싸오셨을 거다.
가져오신 반찬에 아들 딸 며느리와 시집간 딸, 사위며 손자, 조카들까지 불러 밥을 먹였다. 6.25전쟁 당시 쌀이 없어 고생하셨던 기억을 잊지 않으시고 집에 쌀은 꼭 비축해 놓아야 한다 시며 가을이면 열 가마씩 보내오던 쌀…여름에 나는 쌀벌레도 쌀벌레지만 그 많은 쌀로 밥을 다 해 먹었거니…생각하면 나는 요즘도 가끔 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재미있게 추억하곤 한다.

어머님이 싸 오시는 반찬과 밥 먹이는 일은 시댁 식구들을 단합시키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역할을 했다.

어머님이 시집간 딸과 사위, 조카를 부르는 명목은 “내가 싸 온 마늘, 고춧가루 등등 가져가거라”이었으니 먼길에 힘들게 가져오신 것 가서 받아오지 않을 도리가 없어 시댁 식구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우리 집에 모이게 마련이었다. 모이고 먹고 마시다 보면 화목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시댁의 유명한 화목이 맏며느리인 나의 공적이거니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고향 목포의 집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경향 각지의 많은 분들이 오셔서 어머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였다.

그 분들은 어머님이 먹이고 재워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들은 그저 하루 이틀 먹고 자고 간 사람이 아니라, 짧게는 두어 달 길게는 몇 년씩 어머님의 집에서 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식들의 친구(참고·자식이 9남매)이거나, 집안 친척이거나, 시골 고향의 친지와 이웃들 등 매우 다양하였는데 그 수를 다 세지 못할 정도였으나 대략 백이 넘는 숫자로 짐작되었다.

당신 자식 여덟에 조카딸까지 아홉 자식을 기르면서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단명 수를 이긴다는 조카까지도 데려다 거두던 어머님은 홀로된 친정 올케와 조카, 친정 어머니까지도 돌보던 분이었는데 그 속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함께 기르고 돌보셨다니 진정 믿기 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판검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재벌 총수가 되어 있기도 하고 국영 기업체의 사장이 되어 있기도 하고 국회의원이 되어 있기도 하여 나는 어머님이 기르신 사람, 어머님의 그 넓은 품을 진실로 놀라운 마음으로 재인식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쳐 보냈으면서도 어머님은 한번도 공치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인 나도 옛일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잘되고 출세한 그들이 찾아오면 자식처럼 친구처럼 반갑게 맞으셨을 뿐이었다.

전라도 특유의 푸짐한 큰손과 내 자식 네 자식 가리지 않고 모두다 불쌍한 것들로 안으시던 그 풍성한 모성. 짭잘한 젓갈, 투박한 밥그릇이나마 넉넉한 인심은 언제고 그들로 하여금 어머니를 격의 없이 찾게 하였던 것이다.

몇 년 전 캐나다에서 남편의 친구가 나와,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저녁을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기에도 밥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친구였는데 집이 가난한 그 친구는 밥이 먹고 싶어 끼니때가 되면 꼬박 꼬박 남편의 집엘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 때 어머니는 이를 귀찮아 않으시고 상에 같이 앉히고 꼭꼭 밥을 주었다는 것이다. 꽤 오래 그랬는데 어느 날 남편이 뒤주의 쌀을 퍼서 친구에게 주다가 어머니에게 들켰단다. 이를 본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지게꾼을 불러 쌀가마니를 지워 그 집에 가져다 주셨다는 이야기였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사업에 성공을 한 그 친구는 커다란 연어를 들고 와서 옛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이며 되새기는 것이었다.

얼마 전 고향사랑모임이라는 데를 다녀 온 남편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또 하나 듣고 왔다. 지금 서슬이 시퍼런 자리에 앉은 출세한 40대의 그는 시골에서 처음 목포에 나왔을 때 어머님이 집에 재우고 먹여주었다고 무척 고마운 분이라고 일부러 찾아와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 때 기차를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중학생이던 그 시골뜨기는 그 때 얼마나 볼품없는 모습이었을까! 어머니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은 목포에 나오면 당연히 어머님께 와서 자고 가는 것이었다.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면서도 농사짓는 시골 아줌마들과 진정으로 정을 나누던 어머님.―시누이들은 그래서 맨 날 이가 끓어 창피하고 불편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곤 했었다―이런 어머님을 나는 감히 닮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시아버님조차 금년 초에 돌아가시고 이제 우리집안의 화목은 우리 대에 달렸는데 진정 불초인 이 며느리가 어찌 어머니의 그 크신 덕을 흉내나마 내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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