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에 묻힌 작은 열사

그의 희곡 작품 속에서는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70∼80년대 우리서민들의 삶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60년대 대학 재학시절 이중기(65)작가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당시 모교인 경희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황순원·주요섭 소설가와 조병화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영문학 비평을 가르치던 주요섭씨로 인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글쓰기를 시작,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글쓰기는 빨리 시작했지만, 그가 문단에 등단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88년도‘그림자 밟기’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라고한다.

등단이 이처럼 늦어진 이유에 대해 그는 변명 같지만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며 잠시 회한에 젖었다.
70∼80년대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의 부친은 민주화 항쟁의 선두주자로서 활약을 펼쳤었다고.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신의 글도 사회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아버지의 영향을 받게되고, 그런 반정부적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혼자서 많은 작품을 썼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적도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어쩌면 자신의 용기가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었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암암리에 반골이 깃든 책들을 발간했다가 안좋은 일을 겪은 이들도 간간히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등단이 10∼20년 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이중기작가는 ‘내가 등단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차범석(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씨의 리얼리즘주의 재창에 용기를 얻어’서였다고 말했다.

그의 등단 작품인‘그림자 밟기’도‘민주화항쟁을 벌이다 직장에서 해직된 기자를 모델로 도피행각을 벌이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민주화항쟁을 펼치고 다닌다’는 내용으로 그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림자 밟기’는 아무리 짓밟아도 형태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림자를 사람의 몸뚱이에 비유해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80년도 교사재직시절에 혜인여고에 연극부를 창단한바 있으며, 지난 1998년 혜인여고 퇴직 후 현경고등학교(구슬하나)와 해제고등학교(잃어버린 드레스) 학생들의 축제기간동안 연극지도를 해왔다.

퇴직 후 무안 청계면에 전원주택을 지어 꽃과 가축을 기르고 텃밭을 일구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는 “희곡은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할 때만이 꽃이 제대로 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방에서 작품활동을 하다보니 공연장시설 미흡과 낮은 문화수준으로 인해 자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며 각 학교와 군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희망했다.

▲해남출생▲한국희곡작가협 이사 역임▲1988년 희곡‘그림자 밟기’로 등단▲94년 한국문예진흥원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작품선책자에 ‘승무별곡’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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