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목포대학교 교수 / 윤영호(尹榮皓) 선생의 遺稿

[무안신문]

▲전 목포대학교 교수 / 윤영호(尹榮皓) 선생의 遺稿
▲전 목포대학교 교수 / 윤영호(尹榮皓) 선생의 遺稿

해제에서 백제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자못 경이와 흥분을 감추기 어렵다. 천년 숨결을 호흡하고 있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발밑에는 과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선인들이 침묵 속에 잠들고 있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샘솟는 인정에 그칠 줄 모르는 노랫소리는 귀청을 적시는 듯 지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 천 년 전부터 역사의 맥박을 함께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새삼 감개무량함을 이길 길이 없다.

이 고장에서 태어났고 이 고장에서 부지런히 일하다가 이 고장 흙이 되리라 마음을 다짐한 나는 차디찬 바위틈에서 기어이 고개를 밀고 나오는 노란 새싹의 체온에 접하는 듯한 부푼 자부와 솟구치는 긍지심에서 여기 몇 자 적어보는 터이다.

그러나 나의 이와 같은 순진한 생각은 근대사학(近代史學)의 정초(定礎)로 일컫는「래오폴드 랑캐」의 입학정신(立學精神)에 위배되는 위험성을 다분히 지니리라는 어두운 생각이 없지 않음에 먼저 독자제위께 필자는 사가(史家)도 고고학자(考古學者)도 아닌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史實) 몇 가지를 학(學)에 근거하기보다 더 많이 감성(感性)에 근거하여 이 글을 엮어나가게 됨을 솔직히 고백하고 욕심은 다소라도 공감되는 바 있다면 그것으로 전부라는 안이한 생각에서 이 붓을 들었음을 밝혀둔다.

고구려(高句麗)가 대륙에서 웅비하였다면 한반도를 문화의 화원으로 찬란하게 꽃피운 나라가 백제(百濟)다. 그 고구려가 그 백제가 라당(羅唐)의 연합군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한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면 또 다른 한 시대가 새로 시작되어 영원을 향해 흐르는 것이 역사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를「クタゥ」라고 부른다. 「쿠다라」는 「큰 나라」라는 뜻이다. 일본 역사서의 원조인「일본서기 고사기」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어찌되었던 예(禮)와 예(藝)와 애(愛)의 백제는 칠백년 사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고구려도 패망하였다. 이것이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이때로부터 대륙에서 발판을 잃은 우리 민족은 반도성(半島性) 국가민족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멸망된 백제의 귀중한 사료들이 잘 보존되기 어려웠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망국민의 향수를 하루가 바쁘게 서둘러 제거하려는 것이 정복자(征服者)의 통례적 속성이니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지하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침묵의 사료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증인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듣는 일이다. 그러기에 사가들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한 조각의 깨어진 와기(瓦器) 한 점에서 그렇게 한없는 희열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번 목포대학교(木浦大學校)의 고고학연구반(考古學硏究班)에 의해 해제(海際)에서 백제(百濟)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史實)은 충격적인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해제주민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주는 엄청난 자랑인 것이다. 나는 평소에 내 고장 해제라는 땅의 이름에 대하여 다소 미묘하고 야릇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해남(海南), 해주(海州), 진해(鎭海), 남해(南海) 등 해(海)자로 이루어진 땅 이름 가운데 유독 해제(海際)라는 제(際)자가 그리 탐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번 목포대학교 고고학연구반이 올린 쾌거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연계 추상해 보고 난 후 지금의 나는 해제란 퍽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땅 이름이요 거기에 애착하여 다음 사실과 함께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평양(平壤)에서 당화(唐貨)가 발굴되었다(타지역에서는 일체 나타나지 않음) 하여 일 학계에서는 당시 당화는 중국 상인들의 교역거점인 평안도(平安道)에 국한되어 사용되었고 타지역에는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단정, 그 전제하에 역사를 다루었다. 그러던 중 일인사가(日人史家) 「藤田 요오사꾸」가 전라도 무안(全羅道 務安)에서 동일한 당화를 발굴, 당시 당화는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된 것이라 주장함으로써 앞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여기서 나는 등전씨의 한반도(韓半島) 전역운운(全域云云)의 주장에 대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바이다. 그런데 좀 딱딱한 느낌이 있으나 우선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문제가 있어 몇 자 더 적는다.

등전씨가 발견했다는 그 지점이 무안(務安) 이하(以下)의 지점(地點)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안이 해제인지 또는 다른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여기에서 문제 삼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해제가 아니라도(해제일 수도 있지만) 해제에서 아주 가까운 지점이라는 것을 기억해 두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쳐 보는 것이다.

등전씨의 한반도 전역 운운의 배경은 너무도 단순하다. 씨는 오직 평안도가 한반도의 최북단임과 전라도가 한반도의 최남단이라는 점을 그 주장의 근거로 삼았음은 명약관하한 일이다. 다음 글에서 이해되리라 믿지만 평양이 중국 상인들의 교역거점이었기에 당화가 거기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한 일학계(日學界, 전자)에서와 마찬가지로 등전씨도 무안이 중국 상인들의 교역거점이 아니었을망정 교류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의문점만 가졌더라면 그렇다면 그 상륙지점은 어디였을까?, 그곳은 해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쯤은 해봄직한 일이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렀더라도 한반도 전역운운의 주장은 최소한 좀 더 유보되었어야 할 일이 아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당화는 중국 상인들의 교역거점인 평양과 중국 상인들의 교류지인 해제근처(海際近處)에서만 발견되었을 뿐 한반도 전역 어느 것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수 천 년 전의 일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방증이라고 할까 보충설명이라고 할까 어쨌든 각도를 좀 달리하여보자. 수 천 년 전부터 서해는 중국 상인들의 황금노선이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면 서해는 곧 그 활기를 잃고 말았던 사실(事實)은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북경중심(北京中心)의 황화유역(黃河流域) 중국 상인들은 평양(平壤)이 그 거점이요 남경중심(南京中心)의 양자강유역(揚子江流域) 또는 그 이남의 중국 상인들은 좀 대담한 주장이기는 하나 해제(海際)가 그 교류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안 앞바다에 침몰된 속칭 보물선은 어디를 향한 배였을까. 독자제위께서는 나의 이와 같은 추단을 한바탕 웃음으로 끝내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다.

이제부터 나는 우리 고장 해제에 대한 대담한 하나의 상정(想定)을 내리고자 한다.

「해제(海際)는 중국(中國) 상인(商人)들의 교류거점(交流據點) 이었다」 중국의 정치인, 상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또 건너오고, 일본의 정치인, 상인들이 중국으로 건너가고 건너오고 하는 길목이 영암(靈巖)이듯이 해제는 중국 상인들이 또는 백제상인들이 건너가고 건너오는 길목이었다. 해제라는 땅 이름이 태고 적부터인지는 의문이나 또 중간에 바뀌어 진 시대가 있다하더라도 백제시대에는 해제로 불린 것이라고 또 한 번 대담한 상정(想定)을 내린다. 그렇다면 해제란 이두식(吏讀式) 문자가 아닌 정의를 가진 글자일 것이다. 뜻을 가진 글자라면「해제(海際)」는「바닷가」「바다기슭」「바다 끝」 등의 뜻을 지닌다. 특히 중국어로는「해제료(海際了 : 하이 질라)」라고 하면 바다는 끝이다. 다시 말하면 육지라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서 나는 미주(美洲)를 발견한「콜럼버스」의 「야! 육지다」라는 환호성을 재확인하는 미묘한 흥분 같은 느낌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백제를 향한 중국 상인들의 한몫 해보겠다는 양양한 모습이 눈에 보인다. 수일 후 피로한 기색은 십일 이십일이 지나면서 극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끝없는 항해 중 선장은 용기를 불어넣는데 진땀을 뺐을 것이다. 「콜럼버스」가 구름에 속듯이 이들은 도초(都草), 비금(飛禽)에서 속았을 것이다. 육지가 아닌 무인도였음을 알게 된 그들은 얼마나 실망하였을까. 선장의 끈질긴 인내력을 육지인 해제에 닻을 내렸다. 길고 지루한 항해 끝에 외치는 환호성은 무엇이었을까. 서양인「콜럼버스」는「야! 인도다」라고 외쳤다. 동양사람 중국 상인들은「해제료 : 하이 질라!」라고 외쳤다면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바로 이것이 「해제(海際)」라고 불리게 된 연유가 아니겠는가.

이 정도에서 붓을 놓음 즉 하나 혹자를 위하여 꼬리표를 다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한반도 중 해제는 선진된 지점이라는 것을 밝혀두고 수 천 년을 흐르는 동안에 역사의 변천해안선(變遷海岸線)의 변화어장(變化漁場)의 변동에 의해 그 위치는 위나 아래로 이동할 수 있음을 알아야 되겠고 남해안일대(南海岸一帶)에 「톱머리」「토말」「육지 끝」이라는 땅이름이 얼마나 많은 가를 눈여겨 볼 때 해제란 우리 고장이 선진된 지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각자의 판단 이전에 속하는 문제임을 스스로 알게 되리라 믿는 필자는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평화와 자유와 사랑을 구가하며 생을 영위하던 선인들의 삶터였다고 나 또한 자랑삼아 이 땅에 즐겁게 사노라면 지나친 나의 독선이라 할는지?

※ 본 고(稿)는 愚生(유완식, 해제 장동마을 출생)이 25년 전 해제면 외반리에 사셨던 남전 윤영호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본 원고를 받을 시 선생께서 “기회 있을 때 해제 또는 우리 고장 사람들이 해제에서 태어난 것을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신문이나 내 고장의 문예지 내지는 홍보지에 게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는데 잊어버리고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 뒤 원고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를 잊어 찾지 못하고 있다가 근래 책장을 정리하던 중 발견하게 되어 조심스럽게 투고한다. 작고하신 선생님께 원고(原稿)가 아닌 유고(遺稿)를 고장 분들께 알리게 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 이제라도 선생님의 산소를 떳떳이 찾을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하다. (유완식 선생은 현재 부산에서 세무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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