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

[무안신문]

▲이재광(무안군청 친환경농업팀장)
▲이재광(무안군청 친환경농업팀장)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해마다 5월 이맘때면 수십 년이 더 지난 일들이 봄날 아지랑이마냥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햇수로 18년 전. 법외노조였던 공무원노조를 출범시켜 놓고 국민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이 아닌 공무원노동자의 신분(?)으로 5월 영령들을 참배하러 갔던 적이 있다.

제1묘역 앞에서부터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그 흔한 흰 국화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은 묘비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비석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갔다.

“아빠! 아빠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돌아 가셨죠. 저는 아빠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제 가슴 속에 아빠가 살아 계세요”

그날의 그 욱하는 감정이 생채기가 되었던지! 매년 5월이면 움츠리고 있는 의식과 메마른 영혼을 달래가며 망월묘역을 찾곤 한다. 국가기념일에 금년부터는 지방공휴일로 지정이 되었기에 광주시 산하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기념일에 참배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올해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짬을 내어 보리라.

참 많이 좋아졌다. 공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눈치 살피지 않고, 이런 얘기 드러내놓고 하니 말이다. 또 가고 싶으면 연가(年暇)를 내면 되니까! 하지만, 18년 전 그때만 해도 이런 일로 연가를 내겠다고 하면 좋아라할 사람은 없었다.

과장(課長)이라는 사람은 직원의 눈치를 읽고, 계장(팀장)들은 이런 직원과 같이 근무를 하는 것을 꺼리는 눈빛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눈치가 없기에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시고 있는 타 직렬의 연세 지긋하신 계장님께서 출장을 마치고 귀청하는 길에 잠깐 얘기나 하고 가자며 근처 포장마차로 이끄는 거였다.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려줘서 알았다.

노동조합 활동을 해도 티를 내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 피해를 주거나 동료들에게 불편함을 끼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 여겨 보면서 내 행동 또한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곤 했다.

그건 그렇고, 행사가 되었건 집회가 되었건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터득했다. 18년 전 그날도 민주노총과 함께 5월 영령들에 대한 합동참배가 계획된 날이었다.

구제역 방역근무를 하다가 비가 온다기에 연가를 내고 바로 광주로 튀었던 것 같은데, 먼저 도착해서 일행들을 기다리는데 장대같이 퍼붓는 빗줄기도 아랑곳 않고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공무원노조 동지들과 민주노총 지역본부 형제들이 다 모이니 50여명이 넘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대한민국의 힘없고 비빌 곳 없는 하위직 공무원들이 노동자성을 부르짖고 나서서 공무원노조를 출범시키고 당당한 노동자로서 5.18 묘역을 다녀온 소감은 예년에 비해 확연하게 다르더라는 것이다.

이름은 있으되 찾는 사람이 드믄 묘비 앞에 참배를 한다. “고 김재평의 묘” 완도수협 임직원으로 광주에 왔다가 무차별 퍼붓는 기관총의 탄알 앞에 검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져야 했던 영혼. 묘비 뒤에 새겨진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빠! 아빠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돌아 가셨죠. 저는 아빠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김소형 씀”

80년 5월 이렇게 숨겨간 영령들을 떠올리며 했던 다짐은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리라!” “법은 법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2002. 5.16 비를 맞고 망월묘역에 다녀와서 남겨 놓은 비망록이다. 또, 묘비의 주인공은 3년 전인가 문재인 대통령님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처음으로 참석한 5.18기념식에서 유족을 대표해 편지를 낭송하고 내려올 때 안아줬던 김소형씨이다.

80년 5월에 태어난 아이가 벌써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 불혹의 나이 40에 접어들었는데, 발포명령을 내렸던 놈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모르긴 몰라도 역사 속의 비밀(?)로 남지 않을까?

금년은 코로나-19로 민주광장과 금남로의 전야제를 비롯한 거의 모든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참으로 슬픈 5월이다. 그래도 80년 그때처럼 이팝나무 꽃은 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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