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 운동 40주년…서남권 민주화운동 거점 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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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 운동 40주년…서남권 민주화운동 거점 무안(?)
  • 박금남 기자
  • 승인 2020.05.12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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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500여 명 무안터미널 집결, 무안에서 2∼3일 기거하며 광주 진입 시도
터미널 주변 식당들 시민군에 주먹밥…시민군 무안읍파출소 무기고에서 무기 획득
독일 페터슨 기자 무안방문(?)…광주진입 오토바이, 자전거는 가능

[무안신문=박금남 기자]

오는 5월18일은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다. 이에 전남도는 지난 5일 무안터미널, 목포역, 나주 금성관 앞, 화순 너릿재, 해남 우슬재 등을 비롯한 8개 시군 25곳을 5·18 사적지로 지정·고시했다. 5·18 역사 현장을 보존해 오월정신을 계승하고, 5·18민주화 운동 위상을 제고해 나가겠다는 취지다.

본지는 당시 29세의 나이로 무안에서 5·18민주화운동 리더역을 맡아 시민군들이 무기고 획득으로 인해 빚어질 수도 있었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무기 회수 등 중추적 역할을 했던 김학주(68, 무안읍) 씨를 지난 8일 본사사무실에서 인터뷰 했다. 본 기사는 김학주 씨의 취재 중심으로 이뤄졌다. 다만, 이번 취재 과정에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은 시간을 갖고 취재해 나가려고 한다. ● 편집부

◆ 5·18광주민주화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8일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후,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전남대 학생들은 휴교령에 반발, 학교 내에 모여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자 전두환 군사정권은 계엄군을 투입하여 광주를 고립무원 시켰고 계엄군의 폭력 아래 학생과 시민 사망자가 발생하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해 시위 규모는 점차 커졌다. 이에 정부는 5월21일 공수부대를 퇴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광주의 모든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을 끊은 후 광주를 봉쇄시켰다.

5월27일 계엄군은 시민군의 마지막 보류였던 전남도청에 대해 탱크를 앞세워 시민군을 학살하며 진압하여 도청을 점령하고 작전은 종료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 시민군 민주화 운동, 광주와 전남 다소 차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와 전남지역 민주화운동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학주 씨에 따르면, 광주의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봉쇄로 빠져나오질 못했다. 전남지역 시민군들 역시 광주 진입이 어려웠다. 때문에 전남 시민군들은 통신이 두절되다 보니 광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를 잘 몰랐다. 다만 광주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한테 다 죽어간다”고 들었고, 실제 부상을 입고 지역으로 돌아 온 사람들의 증언이 친인척과 형제들이 광주에 있는 사람들의 걱정을 키우면서 자발적 시민군이 형성됐다.

박일상 전 무안군번영회장도 당시 광주고속터미널에서 이유없이 계엄군에게 맞아 팔이 부러지는 피해를 당했다.

◆ 시민군 리더자 없이 오합지졸

시민군들은 대부분 순수한 참여자였다.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갑자기 모이다 보니 리더자가 없었다. 5월21일 해남, 영암 등지에서 무안터미널로 운집한 시민군도 리더자가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고등학생에서부터 50대 이르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층이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시민군에 동참, 버스를 타고 무안에 오다보니 무안에서 2∼3일 머물다 돌아갈 때는 몇 명이 함께 왔는지도 몰라 낙오자가 생겨 집으로 돌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민군도 많았다.

◆ 무안터미널 500명 이상 시민군 운집

무안터미널은 서남권 시민군들의 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5월21일 오후 무안읍터미널에는 해남, 영암, 목포 등지에서 버스와 관광차를 끌고 함께 몰려든 차량이 수십대로 터미널을 가득 메웠다. 추론 해봐도 500여명 이상의 시민군이 무안터미널에 모였다.

이들은 무안읍 유성여관, 무등여인숙 등에서 2∼3일 묵으면서 광주 진입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나주 남평에서 계엄군에 저지당했고, 영광을 통해 광주 진입도 시도했지만 계엄군에 의해 진입을 실패했다.

◆ 시민군 무안읍파출소 무기 획득

5월21일 무안읍터미널에 집결한 영암, 해남, 목포시민군들은 군청옆 무안읍파출소(현 남양세차장 자리)에서 무기를 획득했다.

이를 지켜봤던 김학주 씨는 “파출소 직원들은 모두 도망간 상태였고, 총을 가지고 있던 한 시민군(학생으로 추측)이 잠긴 무기고 열쇠에 총을 쐈으나 첫 번째는 실패했다. 그러자 다른 시민군(군 전역자로 추정)이 나서서 총을 쐈는데 열쇠가 박살이 놨다”고 기억했다.

무기고에는 카빈소총과 미국 우유깡통(겉에 전투용이란 글귀) 안에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시민군은 소총, 수류탄 400여발, 실탄 2만발을 획득해 복사차에 실었다.

그러자 김학도 씨는 복사차를 막고 시민군을 설득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우리지역은 방어할 총과 실탄이 없어 무안군민 모두 죽게 된다”며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민군들이 순수하게 획득한 무기를 돌려주었고, 획득한 무기는 박일상 씨 동생(작고)과 임종대(수협 기사) 씨 등이 복사차를 운전해 망운파출소 주변에 묻어 두었다가 후에 반납했다.

무안읍 파출소 획득 무기와는 별도로 무안읍 유성여관, 무등여인숙 등에 머물고 있는 시민군들이 가지고 있는 소총 수거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군민 안전이 보장되지 못했다. 총기를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자칫 오발 사고라도 난다면 인명 피해가 불가피 했다. 김씨는 서종열 형사와 함께 다니며 총을 수거했고, 시민군들도 순수하게 따랐다. 그 만큼 시민군들은 순수했고 리더자가 없었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지역에서 총을 획득해 가지고 온 상황도 많아 무안 무기고 안에서 획득된 소총보다 더 많이 수거되기도 했다.

당시 일화로 무등여인숙에서 보초를 서던 한 시민군이 졸다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 주변 사람들이 놀랜 적도 있다. 당시 획득된 무기가 광주로 반입됐거나 시민군들이 계속 휴대하고 다녔을 경우 또 다른 사고를 유발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독일 페터슨 기자 무안방문(?)

외국인 기자가 무안에 와서 직접 취재도 했다. 일각에서는 1997년 상영된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슨 씨라는 사람들도 있다.

북부독일방송 도쿄지국 기자 힌츠페터슨 씨는 서울에서 한 택시운전사와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5월19일 광주에 잠입, 영상을 촬영해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독일에서 방송되면서 광주의 실상이 세계에 알려졌다. 힌츠페터슨 씨는 5월22일 2차 잠입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독일 본사에 보냈다.

당시 무안에 온 외신기자와 통역은 외국어대학교(서반어학과)를 졸업한 박병인 씨(몽탄출신)가 맡았다. 하지만 현재 박씨가 작고한 상황이어서 외신기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 광주진입 오토바이, 자전거는 가능

5·18광주민주화 항쟁 당시 계엄군들이 광주의 진입도로 곳곳을 막고 있었기에 자동차로 진입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오토바이나 자전거는 가능했다.

자식들이 광주에 있어 사정이 궁금한 사람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를 다녀왔다. 무안에서도 연일삼 씨가 오토바이로 광주까지 태워다 주는 역할을 했다.

◆ 시민군이 먹은 주먹밥 무안이 먼저

박일상 씨는 “당시 식당을 운영했던 우리 집을 비롯해 주변 식당들이 동참해 5월21일 무안터미널에 모인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 나눠 주었다. 성남리 우천동 주민들이 앞장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기억했다.

따라서 21일 무안에서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주었다고 본다면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전달한 것 보다 빠를 수 있어 일정을 따져볼 필요도 있다.

◆ 무안, 시민군 주역 김학주 씨

▲김학주
▲▲김학주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는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 민주화 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무안은 목포, 해남, 영암, 함평 등지에서 몰려 온 시민군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시민군은 5월21일 무안읍터미널에 집결했고, 2∼3일 동안 무안읍내 여인숙과 여관에서 머물며 숙식했다.

이때 무안에서는 시민군의 중심역할을 김학주(사진) 씨가 거의 하면서 더 큰 화근을 막을 수 있었다고 당시를 여러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김씨는 29살로 박병원 앰뷸런스 기사였다. 박 원장의 일 때문에 매일 전남대학교 병원을 다녔고, 5월17일에도 전남대학교 병원을 갔다가 시위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후 5월18일부터 5·18광주민주화 항쟁이 전개되면서 광주가 봉쇄돼 가지 못했다. 그러자 시간이 남게 됐다.

그러던 차 박일상 씨가 광주고속터미널에서 집으로 오던 길에 이유없이 계엄군에게 맞아 팔이 부러졌고, 주변에서 광주의 시민과 학생들이 계엄군에게 무차별하게 죽어간다는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21일 오전 무안에서 시민군 몇 명과 태원여객 버스를 빌려 타고 목포로 나가 시민군 참여를 촉구했다. 이미 목포역에는 많은 시민군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다. 오후에는 무안터미널에 해남, 영암, 목포 등 외지에서 수십 대 버스와 관광차를 몰고 온 시민군들이 모였다. 시민군들은 흥분해 있었지만 리더자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무안읍파출소 무기고를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김학주 씨의 역할은 매우 컸다. 시민군을 설득해 획득한 무기를 돌려받았고, 외지에서 소총을 가지고 와 여관, 여인숙에 머물고 있는 시민군들을 찾아다니며 소총을 수거하기도 했다. 만약 소총 이용에 대한 경험이 없는 시민군들이 무안읍 파출소 획득무기와 외부에서 획득해 가지고 온 무기를 가지고 다녔다면 자칫 군민들의 안전사고와도 직결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김 씨의 역할은 매우 컸다는 평가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학주 씨를 영웅”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무기 수거로 경찰 무궁화 7개가 버텼다고 할 만큼 공로는 크다. 하지만 전남도지사 표창이 전부다. 5·18유공자 인정도 받지 못했다. 반면 전투중대장(박시종, 고인)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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