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징한 세상 어찌 살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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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징한 세상 어찌 살았소’
  • 박금남 기자
  • 승인 2019.11.18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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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은 최고 열심히 살았어’
가난 때문에 못 배운 ‘까막눈’ 어르신 한글교실
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 한글교실 「시방은 안 무사와! 글자를 안께!」 출간
90세 할머니부터 64세 할머니까지…질곡의 삶 어머니 ‘생애사’ 눈길
42명 생애사, 글 읽고 쓰게 되면서 느끼는 배움의 즐거움 진한 감동 선사

[무안신문=박금남 기자] “이 나이 묵어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겁나게 좋은 것이제, 옛날 같으믄 어떻게 이런 공부를 할 것이여? 꿈도 모 꿀 일이제.”

올해 90세인 전덕례 할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한글교실이 열리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 두고 글을 배우러 간다. 눈이 침침하고, 글에 집중하면 눈물도 나고,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면 불편하기도 하다. 혹자는 그 나이에 한글을 배워 어디다 써 먹을 것이냐고 하지만 한글로 내 이름을 쓸 줄 알고 길을 가다가 간판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제2의 인생을 사는 새로운 맛이다.

아무리 열심히 바른 글을 써보려고 하지만 손이 떨리고 글자는 삐뚤빼뚤이다. 그래도 한자 한자 배워가는 재미가 보람차다.

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센터장 고송자)에서 운영하는 한글교실 강사 김미 무안군문인협회 전 지부장이 한글교실 수강생 할머니들의 삶의 이야기를 옮겨 쓴 「시방은 안 무사와! 글자를 안께!」라는 모음집을 최근 발간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미 강사가 2016년부터 농사일에 바쁜 할머니들을 틈틈이 찾아가 취재해 3년 만에 발간했다.

이 책에는 42명의 할머니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미 강사가 활동하면서 녹음기와 취재를 통해 할머니들의 삶을 그대로 풀어 전제했다. 곧 할머니들의 살아 온 일대기 ‘생애사’다. 글은 할머니들이 읊조리는 푸념을 가감 없고 꾸밈없이 그대로 전제했다 보니 시대적으로도 앞뒤가 없다. 때문에 전라도 사투리를 모르면 영어책 해석보다 어렵고 이해하지 못한 글이다.

김미 강사는 발간사에서 “글씨를 몰라서 남의 뒷전이 편했고, 남편으로부터 ‘암 것도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속에 뾰족한 돌멩이처럼 박혔으나 이제는 한글을 배워 떳떳하다는 말에 보람을 느낀다.”면서 “당신들의 고단했던 삶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디딤돌이 된다면 그 삶이 한때의 고생으로만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모음집 발간 의미를 갈무리했다.

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 한글교실에는 올해 64세인 정광순 할머니가 막둥이다.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 90세 전덕례 할머니다. 대부분이 80대 나이다. 최고, 최저 학생 간 나이 차이가 26년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뻘로 한 세대 차이가 나지만 이곳에서는 동급생이다. 옛날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어머니뻘 되는 학생 할머니도 반장인 막둥이 정광순 씨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불만은 없다.

할머니들의 생애사 글 속에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질곡의 삶이 녹아 있다. ‘그 징한 세상 어찌 살았을까’ 싶다. 때문에 역사적 의미도 깊어 큰 성과로 평가된다.

배고픈 시절, 20대 전후 부모님이나 주변인들의 중신으로 연애 한번 못한 채 시집을 와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고, 끼니도 굶었다. 땅 한 평 없고 집도 없는 가정에서 자식 때문에 포기 못 하고 가정을 지키면서 삶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할머니들의 당당한 이야기다.

요즘 시절이라면 어느 누구 한 명 버티고 살아갈 재간이 없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좋아졌고, 여권이 신장됐다. 호랑이 같던 시어머니와 남편의 폭력과 사랑도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여권신장과 열심히 살아 온 삶 때문이다.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는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몸이 부서져라 살아오다 보니 이제 자식들은 모두 성공해 출가했다. 몸은 골병치레만 남았다. 그래도 자랑스런 삶이었다고들 회고한다.

할머니들은 참고 살아 온 삶을 책으로 써도 몇 권은 쓴다고 한다. 하지만 글을 몰라 한이다.

때문에 늦깎이 할머니들의 한글 배우기 욕심은 살아온 삶보다 열정이 크다. 가난 때문에 못 배운 한글, 나이 들어서라도 한글을 깨우치겠다는 의지가 글 속에 강하게 담겨있다.

학교에 오면 할머니들은 어린이가 된다.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글을 쓸 때는 사춘기 연애편지를 쓰듯 부끄럽다. 한글 받침이 없는 단어를 쓰고 지적을 받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하루하루 한글 쓰기가 늘고 읽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즐겁기만 하다는 게 할머니들 이야기다. 글씨가 그림으로 보이지 않고 글로 읽을 수 있는 까막눈이 맑아지면서 세월의 무게가 아쉽기만 하다. 말로 못하는 영감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수줍게 써보고 주변 자연에 대해 느낀 감상도 글도 담아낼 수 있어 마음은 청춘으로 돌아가고 있다.

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 한글교실 학생들의 공부 성과는 대회 입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지난 2018년 5월5일 제8회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김정순(84) 할머님이 ‘내 말좀 들어주씨요∼잉∼잉∼’으로 질로 존 상(대상)을 수상했고, 2019년 제9회 대회에서는 김단례(76) 할머니님이 ‘즈그아비는 참말로 좋은 양반이었제’로 영판 오진상, 최순례(82) 할머님은 ‘시방이라도 뫼똥에 가서 물어보고 잡소’로 어찌끄나 상을 수상했다.

무안군, 한글교실 수강생들 대상 매년 평생학습축제 열어 배움과 나눔의 시간 가져

무안군 성인 한글교실은 2008년 시작, 올해로 11년째를 맞고 있다. 강사, 책, 학습 도구들로 지원을 해 주면서 11여년 동안 900여명의 비문해인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했다.

또한, 매년 한글교실에 참여한 평생학습단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무안군 평생학습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날 축제에는 한글교실 수강생들의 작품과 동아리 활동사진 및 작품 전시와 1년간 관내 6개 성인한글교실에서 한글을 배우게 된 어르신들의 소회와 가족에 대한 애정을 편지와 수필 등으로 낭독하여 군민들에게 큰 감명을 준다.

성인 한글교실은 백련한글교실(무안군종합사회복지관)·생각이 자라나는 한글교실(무안군장애인종합복지관)·여성농민 한글교실(무안군여성농업인센터)·운남에덴 공부방(운남 중앙교회)·파랑새 한글교실(무안공공도서관)·청계 한글교실(청계정보화센터) 등 여섯 곳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난 9월 망운면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추진위원회가 주민역량강화를 위해 한글교실을 주2회(수·금요일) 운영과 청계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송기술 강사의 재능기부로 청계면 남안리 동암마을회관에서 지난 3월부터 주2회(수금요일)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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