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지키는 사람-4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멘트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몽탄면 사천리 우적동에서 표고버섯재배를 한다는 이근범(37세)씨를 찾아 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만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비어있는 집을 보면서 허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한것이다. 30분쯤 지났을까? 전화도 들어오지 않고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마져도 잘 터지지 않는곳에 사는 자신을 볼것이 무엇 있느냐며 멋쩍어 하면서 나타나는 이근범씨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이근범씨는 이곳 몽탄 태생이 아니면서도 몽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내 배은화씨(32세)의 고향이었기 때문. 그는 나주 다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건축업을 하다가 성남의 한 축사 공사를 하면서 귀농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음이었다.

처음 몽탄에 내려 왔을때는 마을 사람들의 수근덕거림이 많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으면 연고 없는 처가에 내려와서 살고 있는지를 못 마땅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그런 비아냥에는 아랑곳 하지않고 자신의 꿈이었던 목장을 운영하는 것만을 생각하면서 젖소 17마리를 열심히 기르기 시작했다.

서울에 잡아놓은 기반도 자신의 아파트도 모두 던져 버리고 귀농의 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97년 IMF로인한 축산파동은 이씨를 절망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씨는 결코 좌절 하지 않았다. 이씨는 축사를 지을려고 마련해 놓은 땅에 가든을 지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든을 신축할때도 자신이 직접 흙을 바르고 돌을 쌓아 ‘돌담집’을 만들어 부부가 운영해 나갔다.

1년뒤 다시 무언가를 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표고버섯이다. 1999년 배지를 마련하고 2000년 4월에 종균을 접종하고 나서 작년에서야 첫 수확을 했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한다.

지금은 표고버섯 10,000여본을 하고 있어 무안군에서는 시설하우스로 이정도 큰 규모가 없다고 한다. 처음 나무를 벌채해서 참나무를 몽탄까지 직접 운반하고 때마다 그 본을 뒤집어 주는일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고 한다. 자신과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돌담집은 몽탄면 사천리의 명소가 되어 마을분들이 자주 들르시곤 한다고 한다 그럴때면 하던일손을 놓고서라도 차를 대접하는 일에 소홀이 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마을의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굳은일이든 좋은일이든 가리지 않고 참여해 주민들과의 유대도 돈독하다고 한다.

그동안 고생해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그는 전형적인 농군이었다. 아내 배은화씨도 남편이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지만 자신의 일을 묵묵히 잘 하고 있는 모습을 믿기 때문에 이씨와 함께 산다며 웃음을 지었다.
표고버섯재배는 처음 3년이 좌우한다고 한다. 그 3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표고버섯이 잘자라느냐 자라지 않느냐가 결정된다며 자신은 처음의 많은 실수를 경험삼아 요즘은 매일 50kg에서 60kg정도의 질 좋은 표고버섯을 공판장에 내놓고 있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표고버섯은 자연건강식품 바람을 타고 각광을 받고 있다. 이씨농장에서 출하되는 표고버섯은 최상질의 제품으로 직거래 판매시 2kg들이 한상자에 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표고버섯은 예로부터 향심, 마고, 참나무버섯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표고는 봄, 여름, 가을에 걸쳐 참나무류나 서나무, 밤나무 등 활엽수의 죽은 나무나 죽은 가지에서 발생하며 예로부터 맛이 뛰어나 송이 및 능이와 더불어 우리 나라의 3대 주요 식용 버섯으로 대중화 되어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생각 축산파동이후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제는 비록 몽탄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이근범씨는 이미 몽탄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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