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 언론인,용인대겸임교수

과연 한국에 보수주의가 있는가. 필자는 여기서 보수주의의 談論이나 사전적 정의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보수주의란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잘 작동되도록 장치가 되어있고, 시장경제 논리가 활발하게 터를 잡는 이념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한마디 더 보탠다면 보수주의는 분배보다 성장논리,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사회적 책무를 우선시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더라도 건강한 상식이 토대를 이뤄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휴먼정신이 담긴 따뜻한 이념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거칠고 부박하게 느껴지는’진보주의보다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보수주의의 실체에 접근하고, 노무현 개혁정권에 이들이 어떤 보폭을 취하고, 있으며, 이에따라 노무현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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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전적 보수주의 뿐아니라 보편적 보수주의와도 거리가 먼, 한마디로 굴절되고 왜곡된 이념이라는 진단이다. 그래서 ‘한국적 보수주의’라는 특수 용어를 쓰고자 한다. 한국적 보수주의는 수구의 탈을 쓴 세력의 허구적 논리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비판의 내용은‘썩고 병든 것도 감싸안는 것이 보수냐’는 것이 될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특권(기득권)을 향유해온 세력에 다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득권, 혹은 특권세력은 어떤 사람들인가. 논리 전개과정에서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한국 기득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보수 이념을 지닌 정당인 한나라당을 지속적으로 지지해온 서울 강남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의 부의 창출과정이 어떠한가. 저, 개발독재 시절 박정희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오늘의 강남이 생겨났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성, 부의 형성과정, 의식 따위를 살펴보면 한국의 보수주의 세력이 어떤 세력인가를 알게 해줄 것이다. 바로 수구적 태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경제개발 전략이 입안 시행되었고, 이 과정에서개발 정보를 맨먼저 입수해 부를 축적해온 세력이 다름아닌 특정 지역의 특정 학연과 연결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문 보도가 나오기도 전에 개발정보를 먼저 입수해 주택지며, 상업용지며, 공장용지를 사둔다. 또 라면값 기름값 쌀값 오른다는 정보를 먼저 알아채고 미리 라면과 석유와 쌀을 사재기해 한몫 본다. 자기 돈이 없으면 사돈의 팔촌돈까지 끌어들인다. 秘線을 작동해 은행으로부터는 특융을 받고, 관으로부터는 특혜를 받으면서 그 대가로 서로 떡고물을 주고 받는다.

자금이 확보된 것을 기화로 끼리끼리 커넥션을 형성해 군. 관. 재계와의 인사 네트워크를 장착한다. 누구는 사단장, 연대장, 그리고 관공서 도시국장 개발국장 건축과장으로, 누구는 대기업의 인사부장, 총무과장 자재과장, 사업과장으로 내보낸다.

이처럼 자본과 인사의 유통 통로를 확실하게 확보한 뒤엔 서로 먼 눈짓으로 사인만 보내면 더욱 세련되게 소리 소문없이 한건 간단히 처리하고 한탕 해먹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자본 정보 인사의 카르텔을 형성해 권력과 노른자위 자리 세습까지도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빌붙어 연명하고자 하는 타 지역 사람들도 한두 자리씩 내주며 구색맞추기의 세련된 국가나 사회안전망 운영 기조도 유지한다. 이들 세력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강남 세력이 아니겠는가. 출신 지역으로 따지면 영남 세력이 아니겠는가.

지난 5년전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지만 엉성한 관리 시스템, 아마튜어리즘에 입각한 서투른 국가운영 체계, 그리고 남이 하니까 자신들도 통할 것처럼 패밀리와 몇몇 가신들이 거들먹거리며 이권개입, 인사장사를 하다 수십년동안‘권력학’의 노하우가 축적된 구세력에게 덜미를 잡혀 끝내는 불구정권 식물정권 뇌사정권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아왔다. 제대로 해먹지도 못하고 덫에 걸려 허우적거린 꼴이 되어버렸다. 잘한 것도 멱살이 잡혀 웃음거리가 돼버린 현실을 보아왔다.

수구세력으로 불리는 한국 보수주의자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가. 미안하지만 그것은 탈법과 반칙이 아니었던가. 권력과 돈이 있기 때문에 자식들 군대 보내는 대신 외국으로 빼돌리고, 부를 세습하고, 탈세도 당연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부도덕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主流 사회의 특권으로 인식한다.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제대로 배우기 전에 배부터 불렀으니 그런 용어가 있는지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물질로 평가되고, 사람의 인격과 가치도 물신주의의 논리로 재단된다. 이런 천박한 부를 통해 천민화한 것이 오늘의 우리나라 보수주의자의 자화상이라면 틀렸다고 할 것인가.

우리의 보수주의자들은 자기들만이 애국의 선두에 있는 양 국민을 우민화하면서 군사문화가 내세운 냉전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이나 미국 의존의 사대주의적 태도를 보이면서 미국의 오만에 대해 비판하려 들면 좌파로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영원토록 세상이 변해선 안된다며 변화를 조롱하고 냉소한다. 변화도 자기들만의 것이라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런 구조하에서 합리적 보수주의가 터를 잡을 수 있었을까. 때로는 합리적 보수 자체도 좌경이 되는 수도 있었다. 낡은 사고구조에 갇혀있는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산, 정신, 신체적 피해를 본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말은 보수주의지만 극우 파시즘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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