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상대가 이해하려 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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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은 상대가 이해하려 할 때 가능하다
  • 발행인 박금남
  • 승인 2019.07.2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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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박금남

[무안신문=발행인 박금남] 수년 전부터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다. 사업 실패, 지인에게 사기, 퇴직자, 건강문제 등등 이유로 세속을 떠나 산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그들은 자연속에서 한결같이 안분지족하는 모습이다.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채 사람관계를 끊고 자연과 벗하며 살다보니 행복하단다.

직장에서 경쟁하며 하루하루 버티면서 시계추처럼 집과 가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 프로는 대리만족 로망이 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사회는 한치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고 창살없는 감옥으로 구속하고 있다. 마치 행복지수는 욕심과 경쟁속에 살아가는 선진국가가 아닌 후진국 국민들이 높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현실은 얽히고 설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일 뿐이다. 국가가 만들어 놓은 법의 틀안에서 돈, 명예, 직업, 권력, 행복 등을 쫓아 살아가는 것이 일반사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낯선 사람과 첫 만남을 가져야 하고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환경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사람마다 자기 기준과 주장, 그리고 철저한 자기 합리화로 무장이 돼 있기 때문에 설득시키기도 어렵다. 일방적인 상대방 기준 평가방식에 따라 평가받게 되고, 그 평가 여하에 따라 성공과 삶의 의미도 달라지게 된다.

만남의 기본은 ‘소통’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해 오해가 없음’ 이다.

과거 필자는 ‘소통’은 사회구조상 수직적이기에 ‘갑’이 ‘을’을 만나 이해시키고 협의점을 찾아 반영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을’이 ‘갑’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소통’은 어렵다. 언제부턴가 을은 자기만의 틀을 만들어 두고 갑이 백기 들고 투항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갑이 을의 주장을 모두 수용해야 소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학시절 읽었던 글 한 대목이 생각난다. 로마의 한 황제가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변화’를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죽이겠다고 말했다. 어김없이 다음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국민들은 무엇이 변화고 개혁인지 모르는 혼돈까지 생겼다. 답은 황제의 죽음 앞에서 얻을 수 있었다. 국민 모두가 변화되어 있었지만 황제 자신만이 변화되지 않은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다보니 많은 국민과 충신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소통은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전반적인 부분에 필수적으로 모든 문제들을 풀어 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해결책이다. 따라서 소통은 상호 양보와 이해가 수반되지 않고는 어렵다. 곧 그의 삶이 나의 삶이고 그 삶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소통이다. 소통속에 내제된 의미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각자 의견을 한발씩 물러나 양보하고 상대방에게 나의 귀와 마음을 열 때 지속적인 만남은 가능하다.

요즘 우리사회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 생각과 문화적 괴리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기성세대를 지배하는 전통문화와 젊은 세대들이 체득한 신문화간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상호 비난만 있다. 직장의 조직 속에서도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른 생각으로 다른 방향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철저한 자기주장, 자기 합리화로 상대방 비난만 있다. 그러나 이 비난의 말들은 언젠가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부메랑이 된다.

소통은 일방적 통보나 요구는 아니다. 때문에 ‘소통’은 수평적인 대화여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산속생활을 그리워하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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