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박금남

[무안신문] 7월과 8월 중순까지 무더위는 그림자마저 녹일 만큼 펄펄 끓었다. 온열 환자가 매일 속출했고 가축은 폐사되고 농작물은 타들어 갔다. 해수욕장 등 피서지는 발길이 끊겨 한산했다. 땡볕 때문에 나가면 ‘사서 고생’이라는 사상 최악의 폭염이 만든 올 여름 휴가 풍속도다.

옛말에 ‘가난한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는 말이 있다. 더위는 피할 수 있지만 추위는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여름 폭염은 나무 그늘 밑에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견뎌내야 하는 재앙급 수준이었다.

오직하면 사람들은 비구름을 가져 올 태풍을 기다렸을까 싶다. 그런 태풍마저도 우리나라를 아예 근접하지도 않아 기대를 저버리게 했다. 기상청 관측이래 1994년 여름이 더웠다지만 기억에는 올해 보다 더 더웠을까 싶다. 본디 사람 마음은 과거는 기록과 추억일 뿐, 현실이 더 어렵다고 느끼며 사는 게 일반사다.

그런 삼복 염천더위가 오는 23일 물러난다는 처서를 앞두면서 시들해 졌음을 피부에 닿는 밤기운의 서늘함과 부쩍 늘어난 풀벌레 소리로 느낄 수 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이다. 그런 탓인지 요즘 밤이면 집 주변 풀벌레 소리가 크다.

초저녁 어둠이 깔리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 주변을 배회하곤 한다. 어둠이 덧칠된 만상(萬象)은 낮에 보여 준 각양각색의 모습을 잃은 채 모두 검은 형체로만 존재한다. 잘나고 못나고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다. 승달산도 하늘을 배경으로 형체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 갇힌 휴식은 모두가 공평해서 좋다.

서로 경쟁하듯 숲속에 숨어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화음은 자정이 가까워도 줄지 않는다. 가끔 밥값 할 요량으로 뉘집 개가 짖어 정막을 깨는 공해지만 풀벌레들은 상관없이 울어댄다.

시골의 밤은 깊을수록 인간이 만든 소음이 줄고 청량한 풀벌레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도시사람들은 현란한 불빛에 가려 별을 보기 어렵다. 풀벌레 소리도 잊은 지 오래다. 이에 비하면 시골에서 사는 것이 호강이다. 2년 전 바람소리, 빗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골로 이사 오면서 밤 시간만은 고단한 짐을 풀 수 있었다. 이제는 이사할 일이 더 없기를 바란다. 매미 소리에 잠을 설친다며 민원을 낸다고 하니, 팔자 좋은 타령한다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음이 없는 곳이 있을까. 어디를 가나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 창밖으로 과거 중세시대 무사들의 칼날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진 초승달과 그 옆에서 달을 보초서는 별 하나가 선명하다. 가끔 달의 표면을 닦아 낸 구름이 지나가고 나타난 달은 더 밝아 보이고 달빛이 밝을수록 별들의 빛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올망졸망 그 자리에 별들이 많다.

그 옛날의 동심으로 데려간다. 어린시절 등잔불이 밤을 지키던 농촌의 밤은 정막 그 자체였다. 해질녘이면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새들과 소쩍새 소리, 초저녁에는 앞산 뒷산에서 스산하게 울어대던 부엉이, 올빼미에 들짐승 소리도 더해졌다.

당시에는 그들의 울음이 밤을 더 무섭게 했다. 이곳저곳 마을 어귀에는 도깨비를 비롯해 귀신들의 출몰지역도 많았다. 밤은 종일 집안의 노동자 중 한명으로 일하다가 고단한 몸을 쉬는 휴식시간 이었다. 동화책은 별에 대한 이야기도 수두룩했다. 하늘은 총총한 별들이 모든 공간을 차지했지만 동화는 산업화와 과학 속에 매장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팍팍해 졌다.

막내딸이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타가 올까’ 물은 적이 있다.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이 구제역으로 모두 죽어 산타는 오지 못한다”고 했다. 우스개 말이었지만 아이의 희망을 산산조각 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순수성을 깨뜨리는 악마로 전락해 있음을 가끔 느낀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여니 새벽 공기가 제법 차다. 혹독한 여름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초승달과 별은 보이지 않았고, 밤새 울어대던 풀벌레도 아침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낮에는 덥다. “올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 더운 여름이었다.”고 사람들은 여름 후기를 말한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감안하면 내년에는 올 여름보다 더 덥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도 올해 보다 더 강력한 수식어들을 준비해야 될 것 같다. 지난해는 정말 더웠고, 올해는 정말정말 더웠고, 내년에는 정말정말 지독하게 더웠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수식어를 써서 여름의 더위를 포장할까 싶다. 여름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강렬한 땡볕으로 다가오고 가장 더운 여름으로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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