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박금남

[무안신문] 최근 설날을 맞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상대방 안녕을 기원하며 의례 건네는 말이지만 상대방 안녕을 기원하는 덕담을 듣고 언짢아 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슨 복을 받으라는 것인지는 개인의 몫이다. 그렇다면 새해 무슨 복을 받아야 복을 받는 것일까.

일확천금을 버는 것은 복권당첨이나 모를까 아등바등 사는 현재 삶으로는 금전복은 아닐 듯 싶다.

그렇다면 가정이다. 가족이 아프지만 않아도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은 나이 들어갈수록 더욱 절절하게 느낀다. 가족 중 한명이 아프면 가족 모두의 생활리듬이 깨지고 금전적 고통을 받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다. 때문에 가족의 건강과 친인척, 지인들과의 사별만 없다면 복을 받는 한해다. 곧 복이란 “어제의 오늘이 내일이었으면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대부분 가졌으면서도 복 받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은 극히 드물다. 욕심을 버리면 주변의 평범함이 행복임을 깨닫게 되는 데 경쟁 속에서 삶을 비하하고 사회의 불평등에 스스로 자신을 혹사시키며 살아갈 뿐이다.

100세 시대를 맞았지만 그 창창한 남은 세월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기에는 세월에 약탈당한 몸이 허락을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막연한 미래에 하루하루 희생적 투자만 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일상은 자동화되고 타성화 되어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삶으로 여유조차 빼앗겨 버렸다. 세상 역시 제 삶의 수준과 변화에 기반하여 이해하는 경향도 짙다. 특히,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우리는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세상만큼만 보고 살아 왔지만, 이제는 손에 쥐어진 핸드폰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와 뉴스를 접하고 획일화 되는 삶에 길들여지고 있다.

삶 역시 아버지가 운명의 삶을 살았다면 나는 아버지의 삶을 역사로 자식들에게 또 그 역사를 전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세월은 아이들에게는 빨리 나이들 것에 대한 소원을 더디게 들어주지만, 어른들에게는 그 더딤의 소원마저 거절하다보니 젊음은 청춘인줄 모르고 보내고 결혼 후 삶은 청춘의 그림자로 살아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녀들 잘되는 게 부모들 낙이라는 것도 직감한다. 그 과정에서 부모의 무능은 자녀에게 녹아들어 희망과 기대로 자식을 부모의 꼭두각시로 키우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랬다. 배우자나 자녀에게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지녀야 한다고. 기대는 나를 위한 것이고 희망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행복은 내 곁을 떠나고 후회할 때 깨닫는다고 한다. 한때 마음에 들어 사다가 쌓아둔 옷이 옷장에 가득해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에 드는 옷이 없는 것처럼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은 몇 명에 불과하다. 그냥 어울림에 끼어 살아갈 뿐이지만 그 중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초등학교 모임같은 모임들도 있다.

일찍 만난 인연은 그 시대의 동질성과 끈적함 때문에 이어진다. 반면 사회생활은 서로의 취약점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살다가 상대방이 잘못을 하고 사과하면 목소리는 더 커지곤 하는 사회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연필 뒤에 지우개가 달려 있다고 한다.

‘인생은 99%가 비극이고 1%의 희극 때문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만큼 행복하게 웃는 시간은 적고, 우리는 늘 상처를 기억하는 것에만 익숙해 있다. 그리고 상처를 잊고자 하면 더욱 또렷하게 새겨진다. 혼자 있는 밤은 힘들고 지친 약자에게 도망의 공간이어서 좋지만 두려움은 고요 속에서 금방 더욱 커진다. 결국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기억속에 녹아 있어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을 보내지 않는 상처와 그리움은 그리움이 아니다.

여름날 비바람에 떨어진 낙엽은 가을의 낙엽보다 상처가 많다. 낙엽이 아름답게 느끼는 경우 나이가 들었음이. 그래서 단풍놀이는 나이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모양이다.

3월이 오면서 올 겨울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쫓아내는 남풍은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해준다. 무엇이 복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다시 한번 고민해 보면서 결국 어제의 오늘이 내일이 되기를 바라는 평범함이 ‘새해 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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