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도 않는 좌파 비판은 국민들에게 식상감을 준다”

[무안신문] 대구경북 지역민의 진보적 성향은 원래 뿌리가 있었다. 그 근원은 조선조 때 기호학파 세도에 밀린 영남학파가 현실타파를 위한 저항적 위정척사 운동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승화시켜나간 데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의병활동, 국채보상운동, 항일독립운동 등 진보개혁운동의 선봉에 선 것인데, 3차에 걸친 10.1항쟁도 그 연장선이었다. 먼 훗날 4.19학생혁명, 6.3사태도 대구가 도화선이었던 것도 이런 진보적 성향의 전통 때문이었다.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진보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출신 비율을 보면 대구 경북 출신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다. 깨어있는 지식층이 많은 결과였다.

김단야(김천) 박열(문경) 김두봉(동래) 김원봉(밀양) 이육사(경북) 이상화(경북) 박문규(경산) 이관술(울산) 이재복(안동) 이여성(칠곡) 이쾌대(칠곡) 박상희(구미) 안영달(경남) 황태성(상주) 임종업(김천) 김달삼(대구에서 소년기 보냄) 문상길(경북), 제주 4.3때 박진경 9연대장을 암살한 손선호(경주) 등 하사관들도 영남 출신들이다. 인근 원주와 충주의 이만규 김삼룡, 양양의 최용달도 대구 사회주의 인맥과 늘 함께 했다.

이를 보면 대구가 이 나라의 진보와 사회주의 구심점이고, 사회주의 큰 산맥이며, 한국 사회주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대구경북은 해방되면서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상하이 등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숫자가 다른 지역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귀국자들은 주로 망명세력들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분투한 항일투사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왜 이들 숫자가 많았느냐면, 일제 관헌이 이들을 집중적으로 체포에 나서자 만주로 시베리아로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호남·충청 역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체로 자유주의 계열에 비조직적인 데 반해 대구경북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원칙에 투철하고 연대와 단합이 강고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일제 관헌들은 이들을 부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결국 이들은 견디다 못해 도피하거나 망명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온 항일독립운동가들은 고향의 심각한 식량난과 어린아이들이 하나같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목격하고 함께 분노했다. 국토가 두 동강난 채 강대국 통치에 지도자들끼리 분열되고, 일제 강점기의 지배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친일 사대주의자들은 새로운 출세의 도구로 미군정에 충성하며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권력과 부를 쌓아가고 있었다. 민족정통성과 민족양심과는 상반되는 길이었다.

피흘려 쟁취한 해방과 독립이 고작 이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귀향운동가들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 기근과 기아 가운데 착복과 수탈이 여전히 자행되는 것을 보고 침묵할 수 없었다. 결국 투쟁의 경험을 살려 모순극복의 선두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주체라고 할 수 없었다. 거기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농민 노동자 일반시민 구분없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저항세력이 풍부한 전시민적 인적 자원이 뭉쳐서 나온 행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했다. 누가 주체세력이고 누가 추종세력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모호했다. 누구나 동조자고 누구나 주동자가 된 셈이었다.

먼 훗날 반공과 안보로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왜곡했을 뿐, 당시는 누구나 나선 사회변동의 주체였던 것이다. 조직력을 가진 전평과 노평, 운수노조 등 노동자들과 대구고보 대구사범 대구의전 등 학생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사실이고, 공산주의 세력이 잠입해온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그중 시민과 민족주의 양심세력이 더많이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다. 부조리 극복이라는 공감과 연대가 확산됐기 때문에 전도민적 궐기로 나온 것이었다. 대구항쟁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민족주의적 정신이 깃든 시민의 폭발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했다. 그러나 훗날 정치적 이해관계로 이를 왜곡하거나 숨겼다.

당시 미군 정보기관 G-2 집계에 따르면, 경찰측 사망 82명, 행불 145명, 부상 96명, 우익인사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이었으며, 시위대는 사망 6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민간인희생’인용). 한마디로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왜곡이라고 보는 피해자들이 많다.

경찰의 피해는 그대로라고 하더라도 민간인 피해는 축소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총기를 지니고 있는 경찰에 의해 양민이 훨씬 더 많이 희생되었을 것은 합리적 추론이라는 것. 추후 투옥된 사람들과 보도연맹원으로 가입한 사람들까지 처형된 것을 집계하면 희생자 수는 광주항쟁 피해보다 백 배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준표 대표가 대구에 지역구위원장으로 내려갔다면 이런 역사도 돌아보기 바란다. 냉전시대, 크게 존재하지도 않는 ‘좌파척결’ 전략으로 국가를 운영해온 것은 야만이다.

특히 호남을 빨갱이지역이라고 은연중 여론몰이했던 것은 엄연한 궤변이고 조작이다. 광주항쟁은 빨갱이가 개입할 소지라곤 없었지만, 대구항쟁은 시대여건상 사상이 혼재된 상황에서 좌익이 가담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가 빨갱이지역이었던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바란다.

변화하는 새 시대에 맞는 정치 틀로 승부를 보는 것이 더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제는 국민지성이 그것을 뛰어넘는 담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칼럼은 인터넷신문 breaknews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