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소설가, 전 언론인, 해제출신)

홍준표 대표 ‘조선의 모스크바=대구’를 알고 좌파를 말하는가?-①
“존재하지도 않는 좌파 비판은 국민들에게 식상감을 준다”

[무안신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권을 ‘좌파 국가주의’라고 정의했다. 지난 22일 신년기자회견에서 그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좌파’를 17차례나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해 언론 평가는 싸늘하다.

국민일보는 <홍 대표, ‘따뜻한 혁신’ 행동으로 보여라>, 한겨레는 <평창을 ‘평양’이라 부르는 야당, 해도 너무한다>, 한국일보는 <한국당 지리멸렬 이유 확인시킨 홍준표 대표의 신년회견> 등의 사설을 통해 “왜 한국당이 대안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비판했다.

보수언론인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아예 그의 기자회견 언급조차 안했다. 조선만 단순히 신년 기자회견문을 요약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보수언론에서조차 보수야당 대표의 신년기자 회견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가 이런 ‘굴욕’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과연 지금 좌파가 존재하는가, 이 땅에 교과서적 개념으로서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있나. 민주당이나 한국당이나 정강정책을 보면 그게 그거다. 지난 대선에서 내민 공약을 보아도 큰 차이가 없다.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기 위해 복지를 늘리고, 그런 가운데 부조리·불평등·모순을 극복하자고 서로 목청 높여 외쳤다.

그런데 계속 좌파 타령이다. 그런 틀에 묶어 지지세력을 확보하자는 의도인지 몰라도, 이젠 낡았고 진부하다. 그 수조차 나이든 태극기부대 등 극히 제한된 인원이다.

냉철하게 현실의 눈으로 보면 한국당은 극우에 가깝고, 민주당은 자유주의 성향이 짙다. 또 굳이 구분하면 극우는 있지만 보수는 없고, 변화세력은 있지만 좌파는 없다. 그런데도 이념논쟁이 뜨겁게 비치는 것은 억지에 가까운 홍 대표의 좌파 덧씌우기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의 기본 통치 틀은 ‘좌파 척결’이 기본 메뉴얼이었다. 그러나 진짜 좌파가 아니라 독재에 저항하는 양심세력들에게 덧씌운 음모의 이름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쟁 대신 남북화해와 협력을 얘기하면 빨갱이로 잡아가두었다.

그렇다고 보수정권이 남북협상과 대화를 안했다면 또 모른다. 7.4남북공동 성명, 노태우 7.7선언은 민주정권이 내놓은 성명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금방 통일이 되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기도 했다. 박근혜의 통일대박은 또 어떤가. 조선일보는 통일펀드까지 조성해 3000억원 이상 모금하지 않았나.

그런데 같은 주장이라도 양심세력이 말하면 잡아가두었다. 보수정권이 말하면 당연시되고, 야당이나 양심세력이 말하면 용공이고 좌경이고, 빨갱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좌빨은 그들 정권유지의 정략적 수단으로 악용한 낙인이었음을 안다. 다시 말해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세력을 잡아가두는 족쇄로 활용한 것이다.

홍준표 대표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가 말하는 좌파의 원조는 바로 대구라는 사실이다. 대구의 많은 시민들이 일어난 10.1항쟁은 그의 관점이라면 빨갱이의 준동이 되는 것이다.

1946년 10월 1일부터 그해 말까지 3차례에 걸쳐 대구 10월 항쟁(지금까지 폭동이라고 명명)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해방공간의 가장 큰 비극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비극을 겪은 10월 항쟁의 본거지인 대구가 더 모르고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박정희 쿠데타 이후 반공보수 안보보수로 70년 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탐욕과 이익이 우선이라는 타산적 이해가 부조리와 시대모순을 극복하고자 사회변화의 기치를 높이 든 정신을 영광이 아니라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다는 그의 친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맞아 희생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박상희는 1930년대부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인 지성이었다. 당시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이 주로 사회주의인데, 그래서 일제는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로 몰아 가두고 고문하고 구속하는 등 잔혹하게 다루었다(당시 민주주의는 일제군국주의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고, 이념의 체계도 아니고, 대중화하지도 않았다)

박상희는 몽양 여운형의 노선을 따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친일경찰과 친일관료, 친일 자본가를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어가고, 시민 탄압은 여전하며, 먹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콜레라까지 창궐하는데 거주의 자유마저 제한하니 지역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10월 항쟁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지휘하다 시위진압 증원 경찰로 투입된 충청도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계속)

* 이 칼럼은 인터넷신문 breaknews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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