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소설가, 전 언론인, 해제출신)

[무안신문] 팩트(사실) 이면에 숨은 진실을 캐내는 작업이 언론인의 역할이다. 때로 사실과 진실은 구분되니까. 그래서 의문과 질문과 추적과 탐사를 통한 진실추구가 요구된다. 이런 것도 없이 권력이 제공하는 브리핑에 의존하는 보도는 죽은 언론이며, 권력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언론이다. 빤히 알면서 수용했다면 교활한 동업자 언론이며, 편파와 왜곡을 하면서 이익을 챙겼다면 언론의 역할을 포기한 영혼없는 위안부 언론이다.

2010년 도요타자동차가 수백 만대의 리콜 사태를 맞았다. 급가속 문제로 대규모 리콜을 실시했던 도요타는 이로 인해 2009년 미국 시장점유율 17%에서 2011년 12.9%까지 떨어졌다. 수백 만대의 리콜 사태로 회사가 휘청거렸다. 지금도 그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요타는 당시 집단소송 손해배상 등 재무적인 문제보다 브랜드 신뢰도 하락이 판매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 언론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요타의 간부는 얼마 후 “우리는 브랜드 신뢰도에 악영향을 줄까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덮고, 언론을 여러 각도로 접근했다. 일본의 언론은 우리의 요구에 애국의 이름으로 협조해주었다. 그러나 그중 하나라도 의구심을 보이며 비판했다면 이런 재앙은 훨씬 전에 예방되었을 것”이라고 뒤늦게 아쉬워했다. 말하자면 호미로 막을 걸 불도저로도 막지 못했다는 자탄이며, 그로인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는 자기 고백이다.

이명박근혜 정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실정(失政)과 불법과 반칙과 유신 회귀의 군림을 유력언론의 비호 아래 손쉽게 덮었다. 그때 언론이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박근혜는 이렇게 비참하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익을 함께한다는 이유로 권력이 부도덕하고 병들고 썩어도 눈감아주고 응원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세력을 도리어 색깔론으로까지 몰아 밟았다. 그 결과 유력 보수언론은 박근혜 권력의 자멸을 자초한 일등공신이 돼버렸다.

한때 일부 유력언론은 군부독재에 맞서 숨죽이며 한숨짓는 국민과 함께 민주화의 힘겨운 수레를 끌었다. 정론의 가치와 계몽주의적 소명의식으로 정의와 양심의 길을 이끌었다. 그런데 언론사끼리 경쟁이 심화하고, 사세를 확장한다는 미명 아래 천민자본주의와 동맹을 맺더니 지면은 자본가 위주, 몰상식한 권력의 주변부로 전락하면서 끝내 국민의 집단지성에 용도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한마디로 돈 앞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구름의 층위에서 호령하고 훈계하고 지시하려 한다. 그러기엔 너무 늙고 타락했다. 신문제작 의제라고 해봐야 갈라파고스의 동물처럼 진화를 모른 채 남북대결, 지역분열, 세대갈등, 상호 이간질과 파편화의 틀 속에 국민을 가두는 수구 프레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박근혜가 정권을 몰락시킨 주범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싸랑소 어른행세하고 있다.

세상은 변화하고 다매체 시대에 여론시장 역시 변화하고 있다. 보수매체들의 시장 영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경쟁력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나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바른 길을 가는 권력에 대해선 격려하는 본래의 기능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면 독자와 국민이 떨어져 나갈 이유가 없다.

현재의 문재인 정부도 잘못한 것에 대해선 가차 없는 비판이 요구된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빠져서 굴욕외교니, 혼밥방문이라느니, 지엽적인 것으로 비싼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문제다. 정파적 이해로 보수정권을 맹목적으로 엄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 이익과 멀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두들겨 패면 독자와 시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뉴스의 ‘음험한 공작’을 식별해내는 국민지성이 그들보다 몇 걸음 앞에 있기 때문이다.

독자가 계몽의 대상이 될 만큼 후진적이고, 어수룩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보호해주어야 할 권력과 버려야 할 권력을 시장에서 먼저 안다는 것이다. 편파와 왜곡, 대중 조작적 보도태도는 독자와 시민이 먼저 가려볼 줄 안다. 그것을 외면하고 멋모르고 시민을 가르치려 한다면 더 빨리 도태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언론이다. 다시 말하지만, 요즘 심각하게 떠오르는 언론보도의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에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점이다. 디테일이 담론을 먹어치우고 있다. 지엽적인 것을 시시콜콜 내세움으로써 핵심과 본질을 외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런 것이 정파적 이해의 소구력으로 악용되고 있다. 디테일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독자의 비판력을 흐리는 잔재주로 이용된다면 그것 역시 사술이며, 왜곡이 될 것이다.

언론이 정도를 가면 정치도 바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민주국가에서 정치는 언론에 비하면 한줌의 힘도 안된다. 그만큼 바른 언론은 세상을 끌어가는 힘이다.
(이 칼럼은 인터넷매체 breaknews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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