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학자를 많이 배출한 진주 강씨의 마을-산길1리 신등

신등 마을은 용골 등길골 감나무골 신등으로 이뤄졌다. 22번 지방 도로에서 원갑사 쪽으로 1㎞ 가량 들어오면 만나는 마을로 오목한 곳에 위치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단치산을 주산으로 하고 臥筆의 안산을 마주하고 있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이 마을의 입향조를 姜渭碩으로 보고 있다. 강위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인 강 흘(姜 屹. 1571-1592)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북 순창에서 세거하고 있던 강 흘은 아우 진과 함께 우계 성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순, 순창, 남원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김천일 장군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였다. 그러다 진주성이 함락되고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김천일 장군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일생을 마쳤던 의로운 선비다.

▲ 단재산 아래의 신등마을

강위석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옷과 평소 쓰던 물건만을 간직한채 고향인 전북 순창으로 가지 않고 이 마을에 들어와서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강 흘의 묘는 현재 광산리 발산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진주 강씨 문중만이 아니라 여산 송씨의 해제면 최초의 입향지이기도 하다. 지역의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674년에 세운 월송재(月松齋)는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송득현(1624-1692, 진주 강씨 문중에 장가를 듦)과 강시헌(1661-1712)이 세운 강학소이다. 처음에는 두 채의 초가집으로 시작하였으나 조선조 말에 聾村 송유옥(1832-1908), 백계 강율수(1881-1951), 만취 강대석(1828-1906) 농은 강대연 등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할 정도로 의미 있는 배움터로 발전하였다.

▲ 강산마을의 여부재

마을의 오른쪽에는 태원농장이 조성되어있다. 농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마을 앞 뻘이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상쾡이를 비롯하여 각종 수산자원이 많았는데 물길이 막히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더욱 더 아쉬운 것은 이러한 황금농장을 잃었으면서도 그에 대한 한 푼의 보상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을의 뒷산은 단재산, 망재산, 또는 단치산, 망산으로도 불린다. 전부 백계선생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國喪을 당했을 때 백계선생이 산 위에다 단을 차려놓고 북향하며 곡을 하였던 데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산 정상에는 백계선생이 써서 刻했다는 큰 돌이 있다. 그 돌에는 ‘의(애통할의)古坮’라 각이 되어 있다. 앞산은 문필봉으로 臥筆의 형국을 하고 있어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대로 이 마을에서는 학자가 끊이질 않고 배출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솔대길이란 팻말이 있다. 조선시대 이 마을 출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배출하였다 해서 유래된 이름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을 길에 붙인 이름이다. 솔대는 솔터라고도 한다.

▲ 용이 승천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마을-산길2리 구등

구등은 산길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는 舊登吉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구등 하면 의미가 없지만 구등길로 쓰면 지명이 갖는 본래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나 진주강씨 김해김씨 족보에도 전부 구등길로 나온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인에 의해서 행정구역 개편 때 그들의 잣대로 구등길에서 구등으로 간편하게 바꾼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 구등마을의 꽃샘-단물이 나온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다. 주민들이 모두 김해김씨로 알고 있어 김씨 족보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자료가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후에 함풍이씨와 진주강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삼거리와 본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천등산을 주산으로 하고 문필봉과 잿등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는 와우형의 지형이다.

이 마을은 만민교회의 이재록 목사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도 생가 터가 남아있는데 터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치유 능력을 주었다던 단물의 생산지인 꽃샘이 있다. 이 마을은 원래부터 두 개의 샘이 있었는데 천등산에 있는 샘은 암샘이고 꽃샘은 숫샘이라 불렀다. 주민들은 암샘보다 숫샘의 물을 주로 사용하여 생활했다. 지금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지하수를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어 꽃샘이 예전처럼 주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진 않았다.

마을 뒤 용혈은 주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 지역이다. 현재 그곳에는 우리농산물창고가 있는데 몇 차례의 주인이 바뀌어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가 요즘에서야 안정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주변 마을의 한 가문에서 용혈 주변에 묘를 썼다가 집안에 불구자가 많이 나와 지금은 묘를 전부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용혈에서 궂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천둥이나 벼락에 놀라는 용 등에다 건물을 짓거나 묘를 써서는 안 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신등 운곡산방

이 마을은 화목하고 단합이 잘 되며 개척정신이 강하다. 1970년 중반 나무젓가락과 성냥의 원료가 되는 버드나무를 마을 주변에 심어 많은 소득을 거뒀다. 이어 1976년에는 이러한 마을의 노력이 인정받아 새마을사업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하사금을 받았는데 그 돈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2,000평의 마을 땅을 샀다. 이 땅은 현재까지 마을 공동의 소유가 되어 마을 자산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전라남도에서 최초로 친환경마을로 선정되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 마을 앞 농장을 빼앗긴 미강산의 마을-산길3리 강산

이 마을은 점단 서당골 오약동 절밑에 등 4개 마을로 이뤄진 산길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뒷산인 강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해제면의 진산인 봉대산의 맥을 이은 糠山은 쌀겨산이라 부를 만큼 쌀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을 빈촌이라 할 정도로 주민들이 어렵게 살았다. 궁벽한 산촌에다 나루를 끼고 마을이 위치하다 보니 도박과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그러다 광복 이후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면서 농장이 형성되고 마을 이름처럼 쌀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마을이 되었다. 해서 주민들은 米康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때는 마을 단위 쌀 생산량이 전국에서 제일 가는 마을이기도 하였다.

▲ 산길리의강산사

이 마을은 강산을 주산으로 하여 우로 청강바위, 좌로는 똥섬이 있고 앞으로는 널따란 간척지가 펼쳐있어풍수적으로 꽉 짜인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일로 감돈리에서 이주한 광산김씨 김덕규(자-도원, 1708 - 1771)이다. 그 외에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마을의 주산인 강산은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산이다. 예전에 비가 오지 않을 때 해제면에서는 봉대산이 아닌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지낸 후에는 반드시 하늘에서 응답을 했다고 한다. 해서 주민들은 명산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우제봉이라고도 부른다.

봉우리 밑에는 구사동(고사동) 또는 중산골로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이곳에는 예전에 원갑사의 전신인 강산사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의 자리인 절터고랑으로 옮기면서 원갑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해제면 내에서는 강산의 원갑사를 두고 전해오는 노래가 있다. “구경가자 구경가자 천리강산 구경가자”라는 노래가 전해올 정도로 해제면의 주민들은 강산과 원갑사를 보고 싶어했다. 또한 주민들 사이에는 ‘죽어 저승 가면 저승사자가 원갑사 기둥이 몇 개냐고 물어 본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의 주민들이 원갑사의 신자들이다.

▲ 이재록목사의 송덕비

현재 태원축산 자리가 강산나루터였다. 이곳은 지도로 가는 길목으로서 연륙이 되기 전에는 교통의 번화가였다. 여러 채의 주막이 번성할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다. 마을 앞에 황새바위가 있었으나 길을 내면서 없어졌다. 마을 뒤에 공동묘지들이 들어선 공동산이 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