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박금남

[무안신문] 가을이 익어가는 한켠에는 상실과 결핍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대체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나 봅니다. 우리는 매일 머릿속 어딘가에 새로운 것들을 저장하고, 그 저장된 파편들이 희미해져 가면 세월의 깊이를 실감하곤 합니다. 어떤 때는 자동차 열쇠나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건망증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집착에 의한 강박증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가을을 맞아 눈이 호강합니다. 오곡백과 풍성함은 접어두고라도 어디를 가나 억새들이 머리를 산발한 채 계절의 깊이를 일깨워 줍니다. 이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군락을 이루어 있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속 오솔길에서 만나는 하얀 구절초나 푸른색 투구꽃 한 두 송이도 아름답지만 꽃이나 자연은 군집을 이루고 있을 때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따라서 스마트폰을 꺼내 그 풍경을 담아보지만 기계는 기계에 불과해 그때의 감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시시때때 셔터를 누르곤 하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가을을 겪는 사람들의 동병상련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지요. 군집을 이루면 편을 가르고 서로 반목과 질시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비난합니다. 이들 무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과 사회를 비판함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요.

또한, 가을 초입에서는 부고장이 많이 날아옵니다. 환절기라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청첩장도 많은 걸 보면 가정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웃을 일과 슬퍼해야 할 때가 많으니 처세에 약한 사람들은 가을이 싫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참 바쁘게도 살고 있습니다. 바쁨의 척도가 ‘열심히 사는’ 사람처럼 비쳐지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직급이나 연봉이 기준이 되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 할 만큼 많은 약속을 가진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그 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늘 관계를 맺어 놓고 살아야 안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소통 없는 일방통행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잘난 체 하고 그러다 보니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더 많은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삶이 아이러니의 연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또한 가을이 주는 우울감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바쁨이 결국 가족의 의미마저 상실해 가게 합니다. 가정은 아이들이 우선순위가 되고 부부의 의미는 약해져 갑니다. 부부 각자의 삶 속에서 상호 기대감은 절대적인 이해만 동반할 뿐 그 어떤 바램이 있어서도 안 되는 시대입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지고 결국 상대에게 불신만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해결 안되는 문제를 가지고 매번 부딪치고 상처주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관리’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와 나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 또한 인생사입니다.

얼마 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풍요로웠던 추석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 추석은 도무지 흥이 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돈이 없어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고 부모들은 효도·건강·용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늙으나 젊으나 ‘3포 세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서민들의 삶은 신산(辛酸)하기만 한데, 저 높은 곳에서 호의호식하는 ‘1% 귀족’들은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떵떵거립니다.

권력과 명예와 부를 모두 움켜쥐고도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이 나라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람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속죄는 커녕 유엔인권위원회에 교도소 방이 적다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국제적 망신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1% 귀족들은 죄를 짓고도 법의 잣대는 다르다는 무전유죄의 세상이 언제나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깊어 갑니다. 아침저녁으로 살갗에 닿는 바람이 옷깃을 여밀 정도라면 겨울 또한 머지않았습니다. 부디 서민들의 겨울나기가 많이 힘들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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