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입향조의 효성이 지명 속에 깃든 마을 - 서호1리 벌포

서호1리는 벌포 솔무정 뒷동산 뒷골로 이뤄졌다. 벌포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서호정이라 하였다. 1987년에 들어서야 벌포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 마을은 나주 정씨 집성촌으로 마을 앞으로 도대로가 지나고 있다. 서호정이란 지명은 무안읍에서 이 마을을 보았을 때 서쪽에 창포만이 있어 서호라 하였는데 이곳에 망해정이란 정자가 있어 서호정이라 한 듯하다. 망해정은 이 마을 입향조가 아버지인 월탄 정기수를 그리워하면서 세운 정자이다.

伐浦는 伐浪浦의 줄임말이다. 벌랑포는 입향조의 효성이 깃든 지명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정씨 鄭 紳(호-牛山. 1576-1640)이다. 우리 지역에서 나주 정씨 문중은 임진왜란 때 두 분의 선무원종공신을 배출하였다. 무안읍 월천리(현재 무안버스터미널 앞)에서 태어난 월탄 정기수(자-인수, 호-월탄. 1559-1598)와 월봉 정황수(호-월봉. 1562-1628)가 그들이다. 두 형제는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의병장이 되어 왜구를 토벌한 충신 들이다. 특히 이충무공의 부름을 받아 한산도 해전과 당포전 등에서 두 형제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을 맞이해서도 이충무공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으나 안타깝게도 월탄공이 전사하였다. 싸움이 끝나고 후손들이 월탄공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 서호정 마을의 달바위

이런 상황에서 월탄공의 아들인 정 신은 선친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1600년대 초에 서해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해안의 한 줄기인 창포만 달바위 위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낮이나 밤이나 선친의 시신을 찾았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하자 창포만의 물결을 시묘 막대기로 치면서 자신의 불효를 한탄했다. 후일 주민들은 입향조의 이러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이 마을을 伐浪浦라 이름 하였다. 즉 물결을 치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포구의 마을이란 의미로 줄여서 벌포라 했다. 서호정이란 이름보다 더 정감이 가는 지명이다.

이어 정신은 부친의 시신을 끝내 찾지 못하자 바다가 잘 보이는 달바위 뒤에 望海亭이란 정자를 지어 부친의 넋을 위로하였다. 현재 망해정은 없으며 그 자리는 골프장 부지에 속해 있다. 후손들은 입향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서해 바다가 잘 보이는 우두산 능선 정씨문중 묘 앞에 ‘망해정시려비’를 세웠다.

마을 뒤에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정씨들의 문중산인 우두산이다. 참고로 입향조의 호도 牛山이다. 서호정 사람들은 스스로 모두 이 산의 정기를 받아서 순하고 힘이 세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 여기고 있다. 주민들은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 힘센 소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창포만이 막히기 전에는 우두산이 반도 형으로 우산반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개어덕샘이 있었다. 마을 잔등 너머 창포만에 접해 있는 샘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이다. 특히 부인병 등 신경통에 효과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맞이를 하였다. 지금은 골프장 부지로 들어가 메워지면서 이름만 남아 있다. 입향조가 망해정을 짓고 부친을 그리워하면서 생활할 때도 이 물을 이용해 식수를 해결하였다한다. 마을 앞에 들샘이라 부르는 공동샘이 있었다.

▲ 서호정 마을 뒤 골프장

망해정 앞에 건넛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건넛등에서 마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기와조각 등 주거지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아래에 솔무정이 있다 현재 주민들은 솔무랑지라고 부르는 松茂洞이다. 문헌에는 盤松亭이란 마을이름으로 나온다.

주민들은 검소하고 부지런하다. 오랫동안 집성촌으로 살아와서인지 마을이 규모가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이나 각종 변란에도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다. 마을에서 고시합격자 등 사회의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 新基洞으로 불러야 맞는 마을-서호2리 신기

서호2리는 개들과 버든들 그리고 신기 마을로 이뤄졌다. 마을 유래지를 보면 ‘새로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 하여 ‘신기’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호4리에 새터란 마을이 있다. 같은 행정구역 안에 한자와 한글로 같은 이름의 마을이 각각 있는 것이다.

▲ 신기마을 전경

이 마을의 입향조는 담양 홍암리에서 세거하던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李大守(족보명-李世秀. 족보를 확인할 수 없어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거지를 떠나 이곳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이 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외손 등 타성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는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참고로 청계면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는 대부분 완풍대군파의 후손들이다. 창포간척지가 막히기 전까지는 이 마을 앞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해서 변변한 농지가 없어 가난하게 살았지만 창포만 너른 뻘에서 낙지 석화 게 등을 잡아서 생활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4리의 연수동, 새터 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分里) 되었다. 또한 그 마을과 함께 동계도 같이 치렀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치른다. 하지만 아직도 마을의 공동행사나 잔치가 있을 때는 같이 어울린다고 한다. 마을에는 1930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동계책이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42년부터의 자료이다.

마을 주변에 남아있는 이름이 많이 있다. 특히 우두산 아래 창포와 접해 있는 지역엔 바위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상여바위 초분바위 문턱바위 구수바위 솥바위 장군바위 지름바위 매바위 줄바우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바위들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중 구수바위는 천연 약수터가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해수찜 하러 오기도 하였으며 지름바위는 마치 노둣돌처럼 서호팔경 중 하나인 창포만의 백정만적을 향해 놓여 있었다. 해수찜은 뜨겁게 달인 돌을 바닷물에 넣어 물을 덥힌 뒤 목욕을 하는 것이다.

▲ 신기마을 주민들과

초분바위는 초분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분은 정월에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는다. 땅이 오염되어 홍역 등 전염병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서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이나 돌 축대, 또는 평상 위에 놓고 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덮어서 두는 것을 초분이라 한다. 벅커리라는 말이 있다. 죽방처럼 고기를 가둬서 잡는 이 마을의 고기잡이법이다.

이 마을에도 깔따구가 많았다. 조금만 서 있어도 시커멓게 달라붙었다고 한다. 깔따구는 대체로 해안가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유독 이 마을은 심했다고 한다. 마을 앞이 바닷가에서 농지가 되고 농가에 농약이 보급 되면서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큰 뒷봉과 작은 뒷봉이 있는데 그중 작은 뒷봉이 쇠머리산이다. 마을 앞에는 외압골과 서당골이 있으며 마을 옆 창포만 주변에는 버든들이 있다. 또한 마을 입구는 개들이라고 한다. 마을 옆에 작은 논을 나타내는 꼬막배미라는 지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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