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에필로그 - 긴 여행이 끝났다. 2004년 7월부터 시작한 마을탐방이 무안읍 교촌리 상사지 마을을 끝으로 376개 마을의 정리가 모두 끝난 것이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과는 보람 있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 실지 무안의 마을 수는 414개 마을이다. 그런데 아파트촌을 빼면 369개 마을이고 여기에 망운비행장건설 3개 마을, 남악신도시건설 4개 마을 등 없어진 마을 7개를 더하면 376개 마을이 된다.

처음 이 탐방을 시작한 것은 어떤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 교사시절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마을에 대해서 정리해 보자’ 라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3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기 고향에 대해서 두 줄 이상 쓰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 마을역사 찾기였다.

토요 휴무제가 아닌 시기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실시했다. 먼저 마을이 선정되면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의 협조를 구한다. 나아가 마을의 역사를 잘 아는 분을 소개 받아 참석하실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 그리고 마을 관련 자료와 문헌을 찾아 정리하고 방문한다. 방문해서 대화를 나누고 자료를 확인한 후에 정리한 내용을 탐방에 참석했던 주민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주고 이상이 없으면 인터넷카페에 올리고 지역신문에 게재했다. 그러니까 발표된 내용은 전부 주민들의 검증을 받은 것이다. 2010년 이후부터는 개인적으로 직장이 정리되어 마을의 역사와 문화 찾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모든 마을의 방문이 2회가 넘는다. 4회까지 찾아간 마을이 있었다. 내용이 많기도 하고 다른 의견도 있어서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13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신문인 무안신문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다. 여러 기사가 넘칠 텐데도 지역문화창달과 문화유적의 스토리텔링활성화를 위한 신문사측의 배려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속한 시간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 때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확인해야 했고 논이나 밭에까지 찾아가야 했다. 마을회관에서 두 시간 이상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유적의 현장 확인을 위해 우거진 숲을 헤치면서 벌침을 맞기도 하고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민심의 변화도 느껴졌다.

2005년을 전후해서 어르신들이 보여준 마을에 대한 진지한 애정과 관심은 2010년대가 되면서 급격히 사라져갔다. 마을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관심이 있는 이장과 그렇지 않은 이장과의 차이는 유래기의 내용에서 확연히 달라진다. 그럼에도 마을유래기를 본 대부분의 주민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아이들을 둔 학부모를 비롯한 많은 주민들이 자신과 마을을 알게 해줬다고 고마워했다. 마을발전에 관심을 둔 이장은 마을 사업의 기초자료가 됐다며 주민을 대신해서 특별히 감사하다고 한다. 뜻있는 노인들은 당신이 있을 때 이렇게 마을의 역사가 정리돼서 너무나 홀가분하고 개운하다고 한다. 또 어떤 향우는 울면서 전화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한 사람인데 자신의 마을 글을 보고 너무 고맙고 반가워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늘 고향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면서도 가보지 못한 고향인데 이렇게 고향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해서 정리해주니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특히 동학유족의 발굴은 대단히 뜻 깊은 일이었다. 자신들의 조상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였음에도 까맣게 모르고 지내온 유족들에게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일이다. 20명이 넘는 동학유족을 찾은 것이다.

▲ 몽탄면 대치리 도요지 확인 모습

[무안신문] ▲ 무안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고을이다

무안은 대단한 마을이다. 어느 지역마다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없겠는가마는 무안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다양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지명인 ‘務安’이란 이름은 757년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면주 물량 면성 등 부침을 겪지만 곧 바로 무안으로 되돌아온다. 지명 유래는 ‘힘써 노력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통일신라시대에 무안을 포함한 함평 진도 일부를 영속지로 갖게 돼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무안 관할지역이 줄어들다가 무안현이 된다. 조선조 말인 1897년에는 무안부로 승격했다가 1903년 다시 무안군으로 낮춰진다. 이어 1914년에는 목포 지역이 떨어져 나가고 1968년에는 신안군이 분리되어 현재의 영역을 갖게 되었다.

무안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말한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하나는 웰빙의 땅이다.

무안은 황토와 갯벌로 이뤄졌다. 무안의 황토는 기본적인 토질도 있었겠지만 중국황사현상으로 수십만 년에 걸쳐서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중국에서 오는 황사는 예전에는 미생물 덩어리였지만 중국이 공업화된 지금은 오염덩어리가 되어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갯벌 또한 리아스식 해변이라는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잘 발달되어 있다. 예전에 무안은 참으로 어렵게 살아왔던 땅이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땅한 재배 식물이 없어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다. 또한 보리쌀 한 되에 한 양동이의 고기와 거래를 할 정도로 갯벌의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청정함과 웰빙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 무안이다. 황토와 갯벌의 가치는 연구하면 할수록 무궁무진하다. 넓게 펼쳐진 황토밭은 지하수 개발로 모든 작물의 재배가 가능하다. 그것도 철저하게 건강에 이로운 식물들 뿐이다. 또 무안을 감싸고 있는 갯벌은 한때 칙칙하고 어두운 잿빛의 뻘로 원망과 한숨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생물의 다양성과 정화기능 미용재료 뿐 아니라 바다의 콩팥, 지구의 허파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 두 번째는 가능성의 땅이다.

기운이 있다. 무안을 받치고 있는 주산이 승달산(僧達山)이다. 원래 이름은 영취산이었다. 그러다 원나라의 승려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이 산에서 수도를 하고 도를 득한 이후 승달산이라 한 것이다. 이런 지명유래에서 보듯이 이 산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기운이 열리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록 318미터 높이의 산이지만 세 개의 대학을 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산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다.

초당대학교가 개교할 때 당시 이사장께서 자신 있게 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자신합니다. 언젠가 우리 대학 출신 중에서 우리나라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 배출될 것임을’이라고. 승달산과 무안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 세 번째는 정신이 살아있는 땅이다.

옳지 않은 것에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무안이다. 1970년대 80년대 군부 독재의 권력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을 때 그래서 아무도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때 무안의 농민들은 외쳤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바로 잡아야 한다’고. 이른바 무안의 농민운동이다. 당시에 무안농민들이 발표했던 성명서는 전국 농민운동의 풍향계가 되었다. 방향이 되었고 지침이 되었으며 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저항정신의 뿌리가 조선조 말 동학농민혁명에서 비롯된다.

당시 무안의 동학은 전국동학농민운동에서도 활발한 축에 해당된다. 비록 문헌상 중심지역은 정읍과 고창 등지였지만 동학의 중간 간부인 접주급 참여자가 제일 많은 곳이 무안이었다. 그만큼 변화와 개혁을 갈망했던 지역이 무안이었던 것이다. 해서 전봉준에 버금갈 창포장수 배상옥이라는 걸출한 동학지도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의롭지 못하고 불의한 것에 저항하는 무안의 정신이 의병운동과 독립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에 이어 농민운동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 1961년에 작성된 삼향읍 유교리 동계안
▷ 그 외에도 무안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가 있다.

우선 이 땅이 살기 좋은 곳임을 나타내는 고인돌이 1,000여기가 넘게 분포되어 있다. 9개 읍면 모든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된다. 마을의 풍속을 나타내주는 다양한 당산제와 놀이가 있었다. 현경면의 석북마을은 당산이 세 곳에 있어 돌아가면서 지내기도 하고 청계면의 월선리 전조제는 정월 보름이 아닌 유월유둣날 들판에서 지내는 특이한 제사이다. 또 정월 보름에 행해졌던 ‘물타러 간다’는 놀이는 물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좋은 문화였다. 문중이나 마을의 자랑임을 밝히는 솔대배미(솔대, 솔대뱀)라는 지명이 10군데나 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솔대는 마을이나 문중에 과거급제자가 있을 때 마을 앞 공터에 세우는 특별한 표시이다.

청계면 도림리의 도림, 망운면 피서리의 솔개산, 일로읍 의산리의 딴봉, 몽탄면 청룡리의 오갈치 등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예견지명들이다. 예전 흑사병 같은 전염병의 창궐과 왜적의 침입을 알 수 있는 말무덤(또는 몰무덤)이라는 지명과 마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죽은 할매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해제는 지리적인 영향 때문인지 용흥 성포 언창 등 곳곳에 금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실지 황금박쥐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는 동굴의 상당부분이 금광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던 망운비행장 건설은 식민지문화를 곳곳에 남겨두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비행기 보관창고인 격납고는 6기가 남아있고 당시의 시설물이 온전히 보존된 2채의 통신시설 그리고 토치카 포대 기관포를 쏘기 위한 굴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는 유적들이 많이 있다. 또한 몽탄역 관사 구일로면사무소 등 일제식 건축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일본인들이 고친 지명이 아직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창지개명이다. 청계면 龜老마을이 九老로 망운면 鼠隱洞이 星洞으로 무안읍 교촌리의 송림(서원)마을이 일본식 표기인 서운내로 불려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잘못된 지명이 30여개가 넘는다.

▲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무안을 찾아야

▲ 1952년에 만들어진 탄도리 토지대장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우리나라는 분명 세계사의 중심에 서 있다. 경제적으로 정보통신 반도체 조선 중화학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로 진출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케이팝 드라마 영화 등 한류와 전통문화에서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기류를 반영하여 각 지자체에서도 문화 창조에 온힘을 쏟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역에 문화적 불씨가 조금만 있어도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문학 음악 미술 공예 등 예술 활동과 예술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서남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지역에는 영산강변에 얽힌 무수한 설화와 유적, 품바에 얽힌 승화된 예술, 승달산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 창포만에 깃든 창포장수 배상옥장군의 외침, 그리고 이 시대의 선승 청화선사의 숨결이 깃든 운남의 대박산, 삼한시대 어쩌면 상고시대의 비밀을 안고 있을 해제의 봉대산 등은 우리가 개발하고 가꿔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역사의 숨결을 찾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지역민으로서 본질을 찾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14년에 걸친 마을탐방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지역이 갖고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을 가꾸고 개발해야 할 새로운 일이 생겼다. 볼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푸념 대신 어렵게 찾아낸 문화의 불씨를 살려 우리 모두 역사와 문화가 있는 무안으로 발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 무안읍 상봉마을에서 발견된 동학첩지

▲ 탄도리 주민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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