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도주할매석과 구남매샘이 있는 이천서씨 집성촌의 마을-내리1리 남천

남천은 내리1리에 속하는 마을로 서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대치천을 건너서 화산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연징산을 마주 보고 있다. 남천이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건지봉에서 마을로 흐르고 있는 내[川]가 세 개가 있고 마을의 위치가 호동을 바라보는 남향이어서 남천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 마을의 입향조가 이천 서씨의 원적지인 남천을 그리워 해 이름을 그대로 지었다는 설이다. 경기도 이천은 고구려 때는 남천으로 불렸으며 고려 태조 때 이천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이천서씨 서덕양 또는 서덕인 형제라 할 수 있다. 무안에 이천서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호조판서를 지낸 서숭로(1422-1481. 자-대수, 호-정암)가 들어왔을 때인 세조 때이다.

▲ 남천 마을전경

이후 1600년대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광산김씨 김향락이란 사람이 1600년대 초에 광산군 평창동에서 마을 뒤에 있는 이곳 탑골에 이주하여 정착한 것이다. 지금은 탑골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뒤 남천저수지를 중심으로 해서 여러 골짜기가 있다. 살펴보면 탑골을 지나 중살골 절골 큰골 문안골 등이 있다.

마을의 한 주민 집 대문에 커다란 탑의 기단석이 일부가 떨어진 채로 놓여있다. 오래전 새마을사업을 하던 중 독다리로 놓여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 한다. 덧붙여 주민은 이 돌이 탑골에서 빗물에 떠내려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한다. 실지로 탑골 옆에 있는 절골에는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상당부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현재 호국사가 있는 골짜기를 홍역골이라 부른다. 예전 마을에 홍역이 들어서 아이들이 죽으면 그 골짜기에다 초분을 쓰거나 항아리에 넣어 버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그곳에는 귀신이 많이 떠돌고 있다고 믿고 있다. 마을 앞에 도주할매석이 남아 있다. 마을에서 모시는 당산입석으로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 그리고 전염병 등 재앙의 방지를 기원하는 제사를 매년 정월 보름에 지냈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 개가 늘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두 개만 들 가운데 서 있다.

예년의 당산제는 온 마을 주민이 함께하는 축제였다. 정월 보름이면 처음 뒷매의 단에서 시작하여 마을 앞에 있는 도주입석 주변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잡인의 출입을 금했다. 마을 뒤에 구남샘이 있다. 구남매를 낳은 샘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지로 샘 아래에 구남매를 낳은 집이 있었다. 해서 아들을 낳고 싶거나 출산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부러 이 마을 구남샘을 찾아오기도 했다.

▲ 쥐꼬리명당을 안고 있는 마을-내2리 화산

▲ 화산 마을 입구의 당산목

화산은 내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공수동과 화산으로 이루어졌다. 화산에 대한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고 있다. 우선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형성시에 연징산에 분화구가 있다고 하여 火山으로 부르다가 후에 華山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花山으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華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집안의 족보에도 華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마을 주민의 대부분은 花山으로 표기해야 맞다고 한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마을에 화순오씨 함평노씨 나주정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향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밀양 박씨를 제외하고는 족보를 확인할 수 없어 입향연대와 입향조를 추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서당뫼에 정착한 화순오씨이며 뒤이어 밀양박씨와 나주정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불낙골에 있는 曺朴洞은 조씨와 박씨가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조팝동이라고도 한다. 또한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는 방앗간으로 사용했던 자리다. 지금도 당시의 흔적인 연자방아가 회관 앞에 놓여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 길은 원래 연징산 계곡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복개되면서 형성된 길이다. 마을 앞에는 수령 400여년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둘레가 310센티미터 되는데 그 옆에는 석천이라 부르는 마을 샘이 있다. 당산나무 주변에는 독배기라 부르며 4개의 고인돌이 묻혀 있거나 방치되어 있다. 원래는 10개가 있었다고 하나 깨버리거나 쪼개 사용해버려 지금은 4개밖에 없다.

이 마을엔 널리 알려진 명당터가 있다. 이른바 쥐꼬리명당으로 알려진 공수동의 이천서씨 묘역이다. 원래 保子孫之地였던 터에 서씨들이 쥐꼬리 모양의 둔덕을 만들면서 형성된 이 명당은 근래 들어 발복이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는 이천서씨 무안의 입향조인 정암 서숭로의 묘가 있으며 이천서씨 제각인 원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제각이다.

마을에 화산가라는 마을노래가 전해오고 있다. 작가가 명확치 않은 노래인데 마을 청년들의 기상을 나타내는 노래다.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에는 화산간이학교라는 학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불려진 노래인 듯하다.

▲ 인동장씨 무안파의 텃자리-내리 3리 양마 마을

▲ 양마마을 연궐정

양마(良馬) 마을은 馬山과 良洞을 이르는 말로 행정구역상 몽탄면 내리 3리에 해당된다. 서쪽으로는 대치리와 총지사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지방도로와 접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陽洞[볕골]과 馬山[말뫼] 마을로 나오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는 陽洞이 良洞으로 바뀌어져서 나온다. 아마도 일제의 한자 간소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명의 한자가 변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마산은 마을 모양이 말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동은 원래 따뜻한 마을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良洞으로 변하면서 현재의 의미인 마을의 모습이 말의 형태이나 어진 말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마산 마을은 뒷산인 馬蜂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동 장씨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장부개(張傅凱. 1452-1508)이다. 장부개는 연산군 시대 사람으로 자는 화지(和之)이며 호는 묵암(黙菴)으로 벼슬은 돈령부영사에 올랐다.

▲ 연궐정신도비
양동 마을은 장부개가 처음 귀양 왔을 때 머물렀던 마을이다.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 기슭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후일 마산 마을에 정착하여 후손들이 번성해지자 경상도 옥산에 살던 玄孫 장육(張淕)이 1635년에 옮겨 와 터를 잡아 형성된 것이다. 원래 양마 마을의 형성은 양동 저수지 위 터에서 비롯되었으나 차츰 아래로 내려 와 현재의 터에 정착한 것이다.

양마 마을은 건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을 향해 뻗은 골짜기 마다 적치재(붉은 꿩이 앉아 있는 형상), 노서골(늙은 쥐의 형상), 성적골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또한 양동 마을에서 대치리 장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쭉짓재라 하며 범바위와 범바윗골도 있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으며 마을 뒤 밭에 있었던 3기의 고인돌도 현재는 없다.

마을 뒤에 있는 연궐정은 입향 시조인 장부개가 귀양 와서 지었던 정자로 귀양살이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장소로 쓰였던 곳이다. 비록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왔지만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정자 가운데 드물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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