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환 시인

[무안신문] 가을바람을 맞으며 가을걷이를 준비하고 우리도 마음을 다듬어서 새로운 도약의 꿈을 펼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여지하 如之何 여지하如之何 ’라는 말이 있다.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말로 ‘이 일을 어찌할꼬? 어찌할꼬? 라는 뜻이다.

결실의 계절 가을에 일상의 많은 화두를 가슴에 묻고 어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모든 만물이 성장의 기운을 멈추고 시들어가는 현상과 지난 계절에 땀 흘린 결실을 맺는 가을의 변화가 우리를 많은 생각과 상념으로 몰입시켜 또 다른 현상을 만들어 고독의 깊은 수렁에 함몰 시킨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생각들이 오가면서 두뇌의 회전이 빨라진다. 글을 쓰는 문인들의 생각은 밤하늘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거림을 쉬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 나라는 존재로부터 시작하여 너라는 사람,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행동들을 끄집어내어 접목을 시도하고 밤하늘 별을 따서 그리운 임께 바치기도 한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바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소설도 쓰고 울기도하고 웃기도 한다.

문인들은 아집 또한 대단하다. 글 몇자 쓰면서 자기 글에 도취되어 주위를 망각 할때도 많다. 그러나 이상한 부류의 문인들도 있다. 글을 쓴다는 미명아래 우쭐거리는 바보 같은 스스로 멍청하게 만드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부류가 있다. 진정한 문인은 겸손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나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또한 대단하다. 나를 버리고 세상을 구하려는 의협심 또한 강하다. 그리고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문인들의 선비정신을 말함이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몇 몇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문인들의 전체를 흐려놓는 일이 많다. 그것은 글쓰는 자의 기본인 인성이 바로서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훌륭한 글을 쓰면 무엇 하겠는가? 그 글은 잡글에 불과함이다.

몇 일전 모 대학 교수와 통화를 하면서 많은 실망을 느낀 적이 있다. 대학이라는 최고 지성의 격을 갖춘 상아탑에서 지성을 배출하는 교수가 생각하는 사고가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교수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옳다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가 문득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사고(集團思考)’라는 단어가 떠올라 당황을 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위해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 백과에서 집단사고는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오직 집단의 목표와 결과만을 중시하고 비윤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결정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집단사고’는 개개인의 다양한 사고가 토론 과정에서 노출되지 않고, 집단의 대표적 생각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현상이다.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조직의 응집력이 높을수록 집단사고의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그 예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인이 대표적인 집단사고의 사례일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내말이 정답이라는 생각의 발상 자체가 교수의 답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친분을 이용해서 한 집단을 음해하려해서 경고를 하려함인데 교수라는 직분을 활용하는 파렴치한 생각과 행동들을 자행했다. 다시 한 번 공자의 말을 되 세기며 그 교수를 이해하려했다.

공자는 모든 일에 두 번은 생각해야 한다. 노나라의 대부(大夫)였던 ‘계문자’는 생각이 많아 세 번은 곱씹은 뒤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두 번이면 좋지”라고 말했다. 여기서의 두 번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한 번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한 번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이로움과 불리함을 생각 한 뒤에 말하라는 것이다. 손자병법 구변편九變編 에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반드시 이로운 쪽과 해로운 쪽을 한데 놓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번 생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악마의 대변자’ 제도를 운영하는 조직도 있다. 교수의 발언을 공개 할 수는 없지만 ‘바로 악마의 대변자’로 이해하기로 했다. 악마의 대변자는 조직 구성원 중 한 명을 ‘악마의 대변자’로 지명해 무조건 반대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결정적 결함을 토론하면서 찾아내고, 의견 내지 정책의 부정적 측면을 보완해서 완성도를 높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자께서는 “어찌할꼬?, 어찌할꼬?”라고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성인(聖人)이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생각이 많으면 우유부단해져서 문제이고 반대로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 두 번 생각하라고 한 것이다.

모 대학 교수와의 대화에서 나는 많은 것을 돌아보고 사색 할 수 있게 해서 고마움을 느끼며 그 대화와 행동들을 잊기로 했다. 나는 가을에 하나를 얻었다. 가을은 생동과 시작을 위해 정지함도 있고 결실을 얻어 다음을 준비함도 있다.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지난 깊은 가을에 우리는 많은 결정을 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실을 얻어야한다. 사무실에서 가을의 무등산이 보인다. 정유년의 가을에 우리는 화두를 ‘여지하 如之何 여지하如之何’ 어찌할고? 어찌할고? 로 삼고 슬기로운 지혜를 얻어 좋은 결실을 얻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