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춘 농업진흥청 작물과학원 목포시험장 前 장장

[무안신문]

1. 양파원산지 및 전래과정

양파의 원산지는 북서인도, 아프가니스탄, 타지크, 우즈베키스탄 및 천산(天山) 서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로 추정된다. 기원전 수천년전에 이미 채소로 이용되었다고 하나 증거가 불분명하다. 일본에는 1871년(명치 4)에서 5년에 권업료(勸業寮)의 손에 의하여 수입된 양파가 다른 서양채소와 함께 당시의 아오야마(靑山)의 관청 정원에서 시험재배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 한국 양파 초기연구 관련자료

우리나라에 양파가 전래된 경로와 소비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1908년 조선농회보 제6권에 원예모범장의 양파 경종성적이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1906년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치되면서 양파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0월 30일 발간한 1905년부터 1966년까지의 농사시험연구결과요람(농촌진흥사업 60주년기념발간)을 보면 양파관련시험연구 결과가 여러 건 수록되어 있다. 초창기 몇 건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911년과 1923년도 한국의 양파 수입 및 소비량

일본강점기시대의 양파 수입량을 보면 1911년에 287,873kg(19,754엔)을 수입하였고 매년 계속 늘어 1923년에는 1,360,219kg(100,759엔)을 수입했다(출처:일본원예잡지 제50년 제5호, 1938).

○ 1924년 경북도종묘장사업보고서에서는 1922~1924년에 수행된 “양파 품종비교시험”을 게재하였다. 적옥총, 황옥총, 백옥총을 공시하였으며 그 성적은 황옥총이 좋았다.

○ 1938년도 경남도종묘장사업보고서에는 1935~1938년에 수행한 “답리작 총두품종 비교시험”에 대해 게재하였다. 결과를 보면 수량이 많고 대구이며 추대율이 적고 품질이 우량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천주황, 천주대평형황, 대판황 등이었다.

○ 농사시험장사업보고서는 1943년에 수행한 “옥총품종 예비조사”를 게재하였다. 천주옥황은 최다수이며 구형황구총, 평형황구총이 다음이다. 6월하순과 7월하순 2회에 걸쳐 고자리 피해와 노균병 발생이 심하여 간인을 하지 않아도 적당한 주수를 얻었다.

○ 국내 최초의 품종은 1958년에 모계선발법에 의하여 춘파양파 육성계통 76080을 선발하여 대관령 1호라고 명명하였다. 양파에 대한 품종육성은 주로 웅성불임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으로 우량웅성불임 유지계통을 육성하였고 채종까지 성공하였다.(원예연구소 50년사, 2003년 발행).

3. 무안을 양파 주산지로 만든 종자 전래와 최초 재배역사

○ 양파 종자 전래 : 청계면 사마리 강동원(姜東遠)씨가 집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양파재배농가에서 체류할 때에 양파 종자 1홉을 구입하여 재배기술서적과 같이 1932년 고향의 숙부 강대광(姜大光) 씨에게 전달한 것이 무안지역을 양파주산지로 발전시킨 계기가 된다.

○ 무안에서 양파 최초재배 역사 : 어린 조카인 강동원 씨에게 1932년에 보낸 양파 종자를 받은 강대광 씨는 그 해부터 가을마다 파종·육묘·정식 등 단계별 작업을 추진해가면서 성장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여 재배기술을 체계화시켰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몇 년간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재배면적이 늘고 생산량이 늘어났으나 소비처가 없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혹시 찾는 사람이 있을까하여 무안시장에 양파를 내 놓았는데 마침 시장을 구경하던 당시 일본인 우체국장이 양파를 보고 깜짝 놀라며 고가로 구입해주면서 목포 큰 시장으로 가지고 가면 일본인들이 사줄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판매를 고심하던 그는 양파를 우마차로 목포중앙시장에 내어놓고 팔기 시작하였다. 그때 목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한국에서도 양파가 생산 되는구나” 하면서 좋은 가격으로 사주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보리농사보다 5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감을 갖고 이웃집에 사는 장의진(張義鎭) 씨에게 양파농사를 권유하였고 생산된 양파는 같이 마차에 싣고 목포에 내다 팔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양파가 소득 높은 작물로 소문이 나자 성남리 인근지역에서 재배하려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무안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양파 개별농가 재배 성공사례로 무안을 양파 명산지로 성장시킨 뿌리가 되었다. 따라서 무안을 양파명산지로 성장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은 종자를 전래한 강동원 씨와 시험재배를 통해 재배법을 확립한 강대광 씨이다.

※ 강대광(姜大光) 씨는 1897년(족보 1898년 戊戌) 2월 23일 무안면 성남리 84번지에서 출생하여 1928년 4월 24일 高玉蓮과 혼인, 그 사이에서 成德, 成禮, 遠實(1933년 12월 19일생), 成遠, 水滿 등을 두었다. 강대광씨는 1975년 12월 21일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33번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아들 遠實씨가 세운 그의 업적에 대한 기념비가 남안리(상천동 마을, 자작굴) 산 32번지 강씨 문중 산에 세워져 있다.

강동원(姜東遠) 씨는 1910년 1월 13일(父 姜大洪, 母 李春梅) 청계면 사마리 235번지에서 출생,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지내다가 숙부 강대광씨의 도움으로 돈을 벌기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양파재배기술을 배워 귀국했다. 1934년 4월 24일 崔末才와 혼인하였으나 아들을 두지 못하여 1978년 12월 24일 姜東近의 아들 姜聲文을 양자로 입적하였고, 1981년 2월 27일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 235번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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