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무안 최고의 명당을 갖고 있는 마을-유교6리 군산동

군산동은 유교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주변에 산이 많아 유래된 지명이다. 삼향읍의 제일봉인 국사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깊은 계곡 속에 자리 잡았다. 얼마나 깊숙한 골짜기였든지 호랑이가 살고 있었는데 호랑이의 피해가 잦아 골짜기 하나를 메워버렸다. 왜냐하면 100개의 골짜기가 되지 않으면 호랑이가 살지 않는다는 말을 따른 것이다. 그 후부터는 마을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임 보(자-광보, 1627-1712)다. 나주 임씨 족보를 보면 임 보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주 회진에서 할아버지인 동리공 임 위의 묘소가 있는 이 마을로 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林(자-平仲, 호-東里. 1597-1668)는 柳湖 林 悏의 둘째 아들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학문이 높아 초시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임명 받았으나 따르지 않고 늘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 군산동 마을전경

이 마을은 花蟹弄珠(화해롱주-게가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의 지세를 갖고 있다. 승달산의 지맥인 국사봉에서 힘차게 내려오는 줄기가 촛대봉을 만들고 마을을 지나 筆鋒(나주나씨 주민들은 피리봉이라 부른다)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은 촛대봉과 필봉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 앞에는 게의 눈이라고 말하는 자연석이 두 개가 놓여 있다. 또한 지금은 없지만 두 개의 돌 사이에 구슬로 여겨지는 둔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 화훼롱주의 눈에 해당하는 입석
원래 이 마을은 수원지 위 국사봉 8부 능선에서 비롯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곳에 수원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내려온 것이다. 지금도 그 자리엔 당시의 집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사봉(283m)은 삼향면의 주산으로서 승달산의 큰 줄기가 영산강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내리면서 형성한 맥이다.

일본인들은 이 산이 명산임을 시기하여 기슭에 두 개의 수원지를 조성하고 봉우리를 무너뜨리면서 혈을 자르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가뭄이 들 때 국사봉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그 정성을 하늘이 감응하여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목포 사람들의 식수를 해결한다는 이유로 이 마을 뒤에 2개의 수원지를 건설하였다. 하나는 제3수원지로 1913년에, 다른 하나는 제4수원지로1928년 3수원지 옆에 건설하였다. 현재 이 수원지는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모두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과 관련된 농업회계법인 호일 소유가 되었다. 호일법인은 군산동을 포함한 유교리 일대에 114만㎡(34만5454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국사봉 아래에 있는 임 복의 손자인 동리공 임 위의 묘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背山臨水에 좌청용 우백호의 짜임새가 어떤 형태의 명당보다 잘 잡혀져 있어 전국의 지관들이 반드시 답사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특히 이 묘소 주위에만 적송이 쭉쭉 뻗어 자라고 있어 주민들은 명당의 기운이 살아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 국사봉 제1명당에서 본 마을전경

이 마을은 논농사를 포함하여 시금치와 버섯 그리고 딸기와 토마토 농사가 주 소득원이다. 주변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을 그대로 이용해 마을을 가꾸고 있으며 마을에 축산농가가 한 농가도 없어 말 그대로 청정지역이다. 해서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물을 그냥 떠서 먹을 수가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외지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은 마을에 들어오면 공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 큰 벼슬아치가 태어날 수 있는 지형의 마을-유교7리 관동

관동은 유교7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원래 밀양 박씨의 터였다. 향교지에도 밀양박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박씨들은 한 가구도 살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나주정씨나 영양천씨도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후 100여년 전에 군산동에 살던 나주임씨 임명묵이 분가하여 마을 앞 응달에 정착하면서 임씨 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임씨들의 족보를 볼 수 없어 자세한 내력은 확인할 수 없었다.

▲ 관동마을전경

이 마을 이름의 한자표기가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1987년에 발행된 행정구역일람에는 冠洞으로 나온다. 마을유래지나 마을 경로당 표지석에는 官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에게 어느 것이 맞냐고 물었더니 冠洞이 아니라 官洞으로 표기해야 옳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의 형세가 후에 벼슬을 할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지형이어서 벼슬 官을 써서 官洞이라 해야 맞는다는 것이다. 실지로 마을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공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국사봉의 맥을 이은 한(황)새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 들판은 싼등이라 부르고 있다. 안산이라 부르는 앞산은 지네형국으로 응달이라는 지명을 안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세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우렁바위라 했다. 마을의 지형이 황새가 우렁을 먹으려고 쳐다보고 있는 형국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농지가 정리되면서 그 바위들은 없어졌다. 사방사업이나 생활기구 등을 만드는데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지금도 싼등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조금만 깊게 파면 뻘땅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마을 옆 관동저수지에서는 꿀 껍질이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되었다. 저수지 위에는 웃깡꿀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예전에는 방앗간이 있을 정도로 여러 가구가 살고 있어서 속칭 김이 나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한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쟁피는 마을 앞 시설단지 뒤에 있는 지역으로 장피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은 이곳이 ‘밥이 있는 자리’라고 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풍요로운 자리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가구 수가 늘지 않고 항상 세 가구가 살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에 살고 있는 어떤 가구도 경제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1가구가 늘어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일설엔 유교 마을의 천석꾼인 나종만씨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그러듯이 이 마을도 노인들만 살고 있다. 그런데 주민들도 적고 마을도 협소한 이곳에 예수생명교회와 주사랑교회 등 두 개의 교회가 들어서 있다. 특이한 점은 마을 주민들 중 기독교 신자는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마을 입구 숲쟁이라 부르는 곳에 나씨 제각이 있었다. 마루를 대리석으로 깔 정도로 멋과 호사를 부렸던 제각이었다.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문화재급에 속하는 귀한 제각이었는데 후손들의 관리 잘못으로 남의 손에 넘어 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그곳엔 교회가 들어서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영골 구능골 장광골 웅광골이 있다. 또한 마을에서 삼향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꾀꼬리재라 부르는 곳이 있다. 꾀꼬리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숲이 우거져 날씨가 조금만 어두어지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고개였다. 왕산리 사람이나 유교리 사람들이 주로 다녔던 길인데 중간 중간에 주막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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