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卜吉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한다. 동으로는 복길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해안과 인접해 있으며 복길선착장이 있어 인근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청계만의 중심 지역으로 낙지와 숭어 등 각종 수산물이 잡히는 지역이다. 본래는 일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호구총수에서 비롯된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福吉里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서는 일서면 卜吉洞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서는 청계면 복길리 卜吉洞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서는 청계면 복길리 卜吉洞과 텁석골로 나온다.

卜吉을 뱃길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 온다. 하나는 ‘마을의 형국이 서해안을 향해 직선으로 쭉 뻗은 데다가 마을 옆에 토끼섬[兎島]이 있어 마치 한자 ‘卜’ 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卜吉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다를 상대로 생업을 이어가다 보니 점술이 많게 되고 점술을 하게 되면 마을이 흥해진다 해서 복길이라 했다 한다. 복길에는 이남규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가 세운 교회와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86인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있으며 토끼섬이 있다. 텁석골에는 두 곳의 옹기가마터가 있다.

▲ 한국전쟁 때 86인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마을-복길1리 복길

▲ 복길마을 앞 복길항

원래는 최씨들이 살았다고 하나 고총들만 있을 뿐 후손들은 없다. 해서 이마을 최초 입향조는 전주 이씨 李宗萬(자-종호)으로 영광 묘장에서 세거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 진만과 함께 일로읍 영화정으로 피신하였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공은 일찍이 집안의 가르침대로 효도와 우애를 바탕으로 생활하였으며 후손들의 학문 증진에 힘을 쏟았다.

이 마을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천혜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안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청계면 제일의 부자 마을로 알려졌다. 해서 도시로 유학 간 중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을 간 학생 수가 다른 마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지금도 봄, 가을 두 철에만 수산물을 잡아도 가구당 1500만원 수익을 쉽게 올린다는 마을이다. 어부들은 대체로 4차례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데 서해안의 칠산바다가 주어장이 된다. 곡우철의 조기잡이 망중살의 병어잡이 소서의 민어잡이 그리고 추석 이후 가을 조기잡이 등이다.

복길 마을은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재임 기간 1948.10-1950.04)를 지낸 목회자 이남규씨의 출신 마을이며,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 마을에서는 복길교회를 세웠으며 교회 옆에 간이학교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다.

▲ 복길마을의 86인 희생자 추모 공원

이런 마을이 1950년 8월 19일(음력)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86명(신원 확인자 71명과 신원미상의 15명)의 희생자를 냈다. 지극히 평화롭고 한가한 마을에 86명의 희생자를 낼 만큼 커다란 갈등이 무엇이 있었을까. 주민들도 확실한 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항으로 짐작할 수는 있다. 평소에 억눌리고 소외받았던 세력들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민군 치하에서 득세하여 저지른 지방폭도들에 의한 주민 학살행위이다.

앞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 위에 복길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 증축을 해서 옛날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입구 오른쪽에는 ‘6.25 86인의 희생자 추모비’가 서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지명으로 큰 나룻길의 통로였던 나룻깐이 있으며 산 너머에 들이 있다 해서 너먼들, 복길 마을을 오다가 이곳에서 덥석 주저 앉았다고 해서 덥석골이 있다. 아래쪽에 있다 해서 아내미, 위쪽에 있다 해서 우데미, 골짜기에 있다 해서 고래미도 있다. 또한 토끼처럼 생긴 섬이라 해서 탯섬[兎島 - 토끼섬], 큰 산 북쪽에 있는 들을 마파지, 나룻깟 북쪽에 있는 부리를 배나리 끝이라 하며, 너먼들 아래에 있는 개를 뻐다개라 한다. 마을 북쪽에 있는 부리로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쇠머리, 그리고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성적골, 마을 남쪽에 있는 들로 작은 너메, 마을에서 덥석골로 넘어가는 고개를 진등개, 그리고 마을 동남쪽에 있는 산을 큰 산이라 한다.

▲지명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복길2리 텁석골

▲ 텁석골 마을전경

텁석골은 복길2리에 속하는 마을로 호구총수를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1980년의 자료에 가서야 복길2리 텁석골로 나온다. 실지 마을의 역사를 보면 인구증가로 1970년대에 복길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지금은 농업과 축산업의 경영으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분리될 당시만 해도 대단히 어려운 환경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크게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는데 연방죽골 질막금골 텁석골(중앙교) 함박금골 등에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복길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으며 간척지 너머에는 주민들이 디진머리 또는 방망치 코뺑이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텁석골이란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이 해변가여서 깔다구가 많아 유래된 이름이다. 해남에는 깔다구가 무안보다 훨씬 많았다. 누렁소가 검정소가 될 정도로 해남 전역에 깔따구가 넘쳤다. 어느날 해남의 한 할머니가 치마에다 해남의 깔따구를 담아 곳곳에 뿌리고 다녔는데 이 마을에 와서는 덥석 퍼 버렸다 해서 텁석골이라 했다. 또 하나는 한 나그네가 청계에서 복길로 가다가 이 마을을 지나갈 때 텁석 주저 앉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유야 어떻든 지명에서 풍기는 소박함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 텁석골 마을 앞 방망치 코뺑이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한양조씨 조경원(자-여진. 1865 - ?)이다. 공은 청계면 상마리에서 살다가 1900년대 초에 이 마을로 건너왔는데 선대는 진사시에 합격한 선비 집안이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는 복합 마을이다. 이 마을은 가난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앞은 바다였다. 쌀이 나올 데가 없다. 연이나 특별한 소득도 없어 춘궁기가 되면 서로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주변에 있는 각종 풀을 뜯어다가 한줌의 좁쌀로 열 그릇의 밥을 만들기도 하고 고구마를 넣어 풀죽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다 간척지가 조성되면서 비로소 밥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1986년에 막아진 복길 둑은 삼향면 왕산리 금동 마을과 청계면 복길리 복길 마을을 잇는 제방으로 이 마을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해준 고마운 둑이다.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고기도 잡을 수 없고 농지가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이 마을은 둑으로 형성된 간척지로 인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을 옆에는 노숙인 재활시설인 동명원이 자리하고 있다. 동명원은 1967년 목포에서 부랑아 복지시설로 개원하여 1984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회관 옆에는 1963년에 개교한 복길국민학교가 있으나 인구 감소로 1994년에 폐교되어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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