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많은 복이 깃들어 번창해질 마을-사천1리 만복동

만복동은 사천1리에 속하는 마을로 건지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룡동과 만복동으로 이루어졌다. 구산리 유곡 마을과 함께 몽탄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계룡동이란 지명은 건지봉에서 등잔걸이를 지나 계서등으로 뻗어 내린 맥이 닭의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또한 만복동은 마을유래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많은 복이 깃들어 번창하고 생기를 잃지 않는 마을’이 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룡동은 몽탄초교 주변이며 만복동은 대부분 면사무소 뒤 피난민촌이 해당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150여년 전으로 보이며 입향조는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창녕조씨이다. 조봉한 일가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오랫동안 이 마을에 거주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지금은 조씨들이 살고 있지 않다. 이어 하동정씨와 김해김씨 나주김씨 등이 들어와 살았다. 이후 1913년 몽탄역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마을 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몽탄 초등학교, 몽탄면사무소 몽탄역과 파출소 우체국 보건소 등이 있다. 또한 한 마을에 천주교 몽탄성당 그리고 한샘교회와 몽탄중앙교회 등 세 개의 교회가 있으며 향토식당인 안성식당도 있다. 이중 몽탄초등학교는 1929년에 개교하였으며 몽탄면에서는 유일한 초등학교이다. 면사무소는 석진면과 박곡면이 합쳐서 석곡면이 되었으며 1939년에 몽탄면으로 개칭되어 사무소와 함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3년에 개통된 몽탄역은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현재의 驛舍는 2001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 만복동 천주교 성당 안의 고인돌

1970년대 이전에 없어진 몽탄 시장은 두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 장이 들어선 것 봉서동의 청다리 근처로 옮겼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아 다시 철도 아래로 옮겼다가 없어진 것이다.

복합성씨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현안이 불거질 때 단합이 잘 된다. 조그만 이해관계로 다투다가도 마을 전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현안이 발생하면 하나같이 단합하여 해결한다. 아직까지는 주민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전쟁 때는 드물게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다.

▲ 만복동에 남아있는 피난민 가옥

▲ 모래내[沙川]가 아닌 빗기내[斜川] 안쪽의 마을-사천2리 사내

▲ 사내마을의 삼효비각
사내 마을은 사천저수지를 경계로 있는 우적동과 함께 사천2리에 속하며 사천리 안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는 ‘사천’ 마을로 불렸는데 언제 ‘사내’ 마을로 지명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을 형성 시에는 마을 앞까지 영산강물이 들어와 배들이 다녔다고 한다. 마을 중앙을 흐르고 있는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月川, 서쪽은 죽림촌이라고 부르다가 사내로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마을 형성은 밀양박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해서 최초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것은 나주정씨 鄭義弘(1594-1646. 자-汝裕, 호-斜川, 효종조)이다. 그는 나주 동강면 시중동에서 살았는데 1600년대 중반에 조상의 묘지를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보고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승달산에 수원을 둔 하천수가 풍족함을 보고 농사 짓기에 알맞다고 여겨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들어온 성씨가 죽산안씨다. 안씨들은 안우적동에서 거주하다 사내마을로 내려왔는데 나주정씨 뒤를 이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경주 이씨 입향조는 李命遜(호-湖山, 영종대)인데 나주 동강면 장동에서 세거하다가 처가가 대치리여서 처가를 가다가 이곳의 풍광이 좋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무안에서 물이 좋은 곳을 나타낼 때 1위는 옥동(현재 함평군 학교면 상옥리), 2위는 사천, 3위는 오갈치로 말할 정도로 물이 많았다. 마을 주변에 99개의 고랑이 있다 할 만큼 계곡이 많아 수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969년에 축조된 사천저수지는 지금까지 딱 한번 물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 20여년 전 제방의 보수공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아무리 가물러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할 정도로 풍부한 수자원을 갖추고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에도 주목 받은 고을이었다. 마을의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많았고 산세가 수려하였기 때문이다. 해서 일본인들이 이 마을에서 그들의 홍보 영화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대나무가 많아 이를 바탕으로 생산된 죽제품은 담양의 죽제품과 견줄만한 물량과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으며 베짜는공장도 있었다. 또한 아랫 마을인 간거실에는 1910년 이전에 세운 사립학교가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에는 세 개의 재각이 있다. 나주 정씨의 재각인 술선재(1923년 건립, 6개의 현판)와 수재정(1939년 건립, 두 개의 현판)이 있으며 인동장씨의 재각인 오가정(1936년 중건, 7개의 현판)이 있다. 또한 두 개의 사찰도 있다. 선혜정사와 관음사가 그것인데 선혜정사는 근래에 지었지만 관음사는 한국전쟁 이후 지었다. 우적동에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한국사제로서 서열 6번째 신부인 이내수의 묘가 있는 것이다.

▲ 정이 넘치는 향기로운 마을 - 사천3리 봉서동

봉서동은 사천3리에 속하는 마을로 간기곡 봉서동 계서등 오동뫼 등으로 이루어졌다. 艮己谷의 간기는 풍수지리에서 북동쪽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영산강에서 바라보았을 때 간기곡은 북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강거실 또는 간거실이라고도 부른다.

▲ 봉서동에 남아있는 정대현

鳳棲洞(봉서동)은 봉황이 깃들어 있다는 마을이다. 몽탄면의 주산인 건지봉이 마을의 뒷산이다. 鷄棲(계서)등은 닭이 살고 있는 형국의 마을을 말한다. 마을 옆의 몽탄초등학교가 닭의 형상으로 운동장에서 길을 향해 튀어나온 부분은 예전에 높이가 있는 언덕이었다. 梧桐(오동)뫼는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을 말하는데 봉서동과 풍수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마을이다. 현재 무안요가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며 대나무와 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마을은 건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곤바대와 오동뫼로 불리는 들이 있다. 곤바대는 방향을 나타내는 용어로 간기곡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이 들[野]은 만호(萬戶)가 살 수 있다는 들로 원래 구산리에 있는 몽탄중학교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일본식 집이 한 채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30여 년 동안 몽탄면장을 역임 했던 정대현씨의 집이다. 해방 전에 건축을 시작하여 해방 후에 완성된 전형적인 일본식 집으로 기둥과 벽장이 모과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식 주택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근대문화 유산이다.

간기곡 마을 입구는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 때 탈출했던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던 자리이다. 목포형무소 탈옥 사건은 1949년 9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죄수들 중 상당 부분이 제주 4·3 항쟁과 여순 항쟁에 관련된 사상범 들이었다. 당시 탈옥자 들은 일로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숲이 많은 이곳 사천리 일대에 숨어 있다가 잡힌 것이다.

이 마을은 정이 넘치는 향기로운 마을이다.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될 뿐 아니라 협조도 잘 이루어져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이 마을은 고시 합격자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공무원을 배출하기도 했다. 오동뫼에 있는 무안요는 도자기 명장 김옥수가 운영하는 공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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