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필봉의 맥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마을-유교4리 청룡

청룡은 유교4리에 속한 마을로 국사봉의 맥을 이은 필봉(주민들은 피리봉이라고도 한다)의 한 맥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마을이다. 이 마을도 120년 전까지 마을 앞에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필봉의 한 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 내리고 있어 생긴 이름이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비자나무동네라 불릴 만큼 비자나무가 많았는데 주민들이 베어버려 마을이 훤하게 비친다 하여 청룡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룡은 60여 년 전에 윗마을인 유교에서 분리된 마을로 노잿등 쟁피(장피) 사거리 청룡으로 이루어졌다. 노잿등은 중등포와 경계에 있는 밭으로서 주변의 평지보다 불록하게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옆에 노재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 청룡마을전경

쟁피는 마을 앞 시설단지 뒤에 있는 지역으로 장피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은 이곳이 ‘밥이 있는 자리’라고 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풍요로운 자리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가구 수가 늘지 않고 항상 세 가구가 살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에 살고 있는 어떤 가구도 경제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1가구가 늘어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일설엔 유교 마을의 천석꾼인 나종만씨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나씨 나상균(1884 - 1968)이다. 공은 임성리 신기 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함풍이씨 이북서로 120여년 전 맥포리 맥포에서 분가하여 주변 환경이 좋고 농사짓기에 좋다고 생각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어서 마을에 살고 있는 함풍이씨 후손의 족보를 보고 이 차이를 확인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마을 뒷산은 나주나씨 함풍이씨 그리고 삼향초등학교 소유의 산으로 이뤄졌다.

유교리에는 비자나무가 많이 있었다. 석교 마을에도 있었지만 이 마을은 비자나무마을이라 할 만큼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자나무를 본 주민은 없었으나 유교마을과의 경계선도 비자나무거리라고 불리는 곳을 경계의 기점으로 삼았다. 현재도 비자나무를 볼 수는 없다.

마을 앞은 거대한 비가림 시설 단지다. 주민들의 대부분 소득이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할 정도로 마을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시설이 처음 시작된 것은 68, 69년 큰 가뭄 이후 1970년부터이다. 당시 농업기술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설 하우스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도마토 뿐이었으나 작목반을 조직하면서 점차 품목이 다양화 되어 현재는 꽃과 파프리카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봄이면 마을 앞이 환하게 빛을 낸다. 몇 해 전에 출향인사의 도움으로 70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는데 봄이면 장관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에 1920년 삼향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삼향초등학교가 있다. 현재의 입장에서 자세히 보면 이 마을이 삼향의 중심지가 아닌데도 삼향중앙초등학교가 이곳에 세워진 것이 의아해진다. 면사무소나 파출소 등 주요 시설 등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그 이유가 일제강점기 때 천석꾼인 유교 마을의 나종만씨가 현재의 학교 부지를 희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교 뒤에 신사당 터란 지명이 있다. 이곳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신사 터가 있었던 곳이다.

▲ 1958년에 시작된 무술년 동계책

▲ 인신공양의 설화가 있는 포구의 마을-유교5리 중등포

중등포는 유교 5리에 속하는 마을로 목포 근교에 있어 도시화가 거의 이뤄진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군산동에서 발원한 유교천이 마을 앞으로 흘러 서해안으로 나갔다.

원래 중등포는 광목간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던 포구 이름이다. 자료에 따르면 ‘중등포구는 구 다도해 식품 앞과 성지산업사 사이에 있었다. 과거 광목간 국도 1호선이 지나갔으나 현재는 서해안 고속도로 목포 인터체인지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마동 앞의 남양제방에서 군산동까지 이르는 유교천에는 세 군데에 다리와 보가 있었다. 원보(큰보)와 중보 그리고 세보 등 세 개의 보가 있었다. 그중 중등포 마을 앞에 있는 보는 중보라 해서 건설 당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 ‘중의 등을 밀어 제물로 바치고 둑을 완성했다’는 인신공양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제방이기도 하다.

▲ 전남예술고등학교 전경

이처럼 이 마을은 포구 주변에서 형성된 마을로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 살았다. 현재도 23개의 성씨가 모여 살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용포에서 이주한 연안 차씨와 왕산리 금동에서 이주한 전주 이씨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는 살고 있지 않다. 주민들도 뚜렷이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와서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중등포는 마을에 포구가 두 개나 있을 정도로 뱃길이 활발하였다. 해서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이 마을을 중심으로 거대한 배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당시에 배나무에 거름을 주기 위해서 목포 등 다른 마을의 인분을 수거해 모아 두었던 인분 저장통이 마을 주변에 여러 개가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은 노재동과 중등포로 이루어졌다. 마을 입구인 중보는 포구여서 사람의 왕래가 많아 한때 주막이 성시를 이루기도 하였다. 해서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관리가 거주하며 포구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이곳에 삼향면사무소가 개설되어 면 행정을 보기도 하였다. 면사무소는 이후 과동으로 옮겨 가 현재의 임성리에서 정착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지적산 주변에 참샘골이라는 곳에 오래 된 구수나무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이 구수나무에서 도깨비가 자주 나타나 주민들과 실갱이를 많이 했다고 하는 등 도깨비 설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실지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빗자루 귀신 채알귀신 등 많은 귀신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해방이후 이 지역의 큰 사건인 목포교도소 탈옥사건과 관련이 있다. 교도소 탈옥사건은 1949년에 400여명의 수감자들이 탈옥한 사건으로 이 마을 주민들은 ‘따르륵 사건’이라고 한다. 광목간 도로가 지나면서 남양제를 큰 저수지와 작은 저수지로 나누었는데 작은 저수지는 이 마을에 관련된 저수지로 옆에는 민둥산이라 부르는 바위산이 있다. 교도소에서 탈옥했던 탈주범들이 멀리 가지 못하고 수십 명이 이 저수지 밑으로 숨어들어왔던 것이다.

결국은 경찰의 수색에 걸려 모두 잡혔는데 민둥산에서 즉결 처분을 당했던 것이다. 경찰은 탈주자들을 일렬로 세워 따르륵 총을 쏴 모두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것을 본 주민들은 탈옥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르륵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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