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솔대목과 3뫼를 안고 있는 마을- 일로읍 용산1리 인동

인동 마을은 일로읍에서 몽탄 방면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일로읍 용산1리로 이 마을뿐 아니라 왕뫼, 연지원, 송암을 포함하고 있으며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인동’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뒷산이 용의 형상이고 마을 앞 우물에서 용이 승천하니 주위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호구총수에는 인동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해주 오씨 대동보나 각종 무덤의 묘비 등에는 한결같이 이 마을의 이름을 용연동(龍淵洞)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마을에 있는 용샘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민들도 언제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려 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들이 용연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대체로 긍정 하는 모습이다.

▲ 인동 마을 뒤 고인돌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해주오씨 오한규(1734-1797. 호-성재)이다. 입향 연도는 1700년대 후반으로 해주 오씨 대동보에 따르면 ‘입향조는 1748년에 의금부 도사의 교지를 받고 활동하다 이후에 종3품인 증직대부로 승진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남악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적혀 있다.

이 마을은 3뫼를 안고 있다. 마을의 주산인 복개산(일명 대통산)의 맥을 받은 첫 뫼가 왕뫼이다. 그리고 마을 앞 송암 옆의 딴뫼와 산정리의 방뫼가 두 번째 세 번째에 해당된다. ‘예전에는 왕뫼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해서 복개산의 형상이 물가에 엎드린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용산리라 했다.

▲ 1995년도 인동마을 소득현황

현재 왕뫼에는 나주 정씨 제각인 금산재가 있다. 예전에 복개산의 정상에는 추석 등 명절 때에는 객지에 나가 있거나 출가를 하였던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 들 가운데에는 용샘[龍淵]이 있다. 이 샘은 마을의 주택과 떨어져 있는데 67년 68년 大旱害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 넘쳤던 유명한 샘이다. 또한 이 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인근에서 보기 드문 좋은 샘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손을 넣으면 시릴 정도로 맑고 깨끗한 물이 콸콸 솟구쳐 올라 흐르고 있었다. 샘 주변에는 유기농 농사의 결과이듯이 크고 작은 우렁이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마을 앞에 솔대목의 터가 있다. 이 마을에서 성균 진사가 배출되었음을 기념하여 마을 주민들이 기념물을 세워 두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터가 없어져 현재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는 밭이 되었다. 주인공은 해주오씨 오복근으로 조선조 말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성균 진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성균박사가 되어 내려 올 때는 그를 보려고 인근의 마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집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은 일로에서 일등 가는 마을이다. 터가 좋아 인물이 많이 나오고 재물이 넉넉하니 인심이 좋고 후손들이 잘 되니 조상들의 은덕이 깊어 주변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마을이다. 또한 샘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며 풍수상으로 길지에 자리 잡고 있어 사사로운 잡기가 가까이 하지 못해 커다란 변고를 겪지 않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회관 건립 때, 다른 마을에서는 전부 郡의 보조를 받아 지었으나 이 마을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세웠다. 회관 자리에는 아름드리의 구수나무 당목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말라 죽었다.

▲ 품바와 설북의 예술가를 배출한 마을-용산2리 농장

▲ 농장 마을 전경

농장 마을은 용산2리에 속한 마을로 공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진등이라 부르는 둔덕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진등의 양 옆으로는 큰공수몰 작은공수몰이라는 골짜기가 놓여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나 주민들은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형상이 지네 머리 모양 같다 하여 공수동이라 불러 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서 간척된 영화농장이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도 농장이라 했다’고 말하고 있다.

살펴보건대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는 공동산 밑 공수동이라 부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공동산에서 영산강을 향해 뻗은 진등은 초기에는 야산으로 무덤이 많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다 1920년대 간척으로 인한 영화농장이 들어서면서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점차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을 이민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등을 사이에 두고 큰 공수물과 작은 공수물이 있다. 모두 조선조에 간척으로 이루어진 농지인데 토지가 없었던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등기부상으로 마을 전체가 주식회사 영화농장 소유의 터였다. 광복이 되었어도 토지가 주민들에게 불하가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토지가 부분적으로 주민들에게 돌아갔지만 아직도 마을에는 무안군 자산관리공사 기획재정부 소유의 땅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지금은 사라져버린 농장마을의 김시라_생가

이 마을은 두 사람의 뛰어난 예술가를 배출했다. 품바의 김시라와 설북의 서창순이다. 김시라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의 참혹성을 바탕으로《품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알린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품바는 없는 자들의 恨을 타령으로 승화시킨 대중 예술의 결정판이다. 김시라의 先代는 이웃 마을 진사동에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대에 학교터라 부르는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현재의 터로 옮겨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김시라의 생가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철거 되었다. 지자체나 지역민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또한 주식회사 세고비아 사장이 이 마을 출신이기도 하다.

서창순은 설북(농악대에서 큰북을 치는 사람의 우두머리)의 대가였다. 1992년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사람으로 농악대에서 영향이 큰 사람이었다. 이 사람 덕분에 60년대 70년대 농악놀이에서 이 마을 농악이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신영희 조상현 같은 많은 선후배 국악인들이 마을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마을에 두 군데의 학교 관련 흔적이 있다. 하나는 지금도 학교터라 부르는 곳으로 간립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김시라의 아버지가 교사가 되어 가르쳤던 학교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이 세운 동신학교(1회-6회까지 공부했다)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자리 잡은 것으로 학교가 일로동초(당시는 일로남국민학교)로 옮기면서 지명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농장 마을은 영화농장을 운영하였던 히또미(人見鹿太郞)의 집이 김시라 집 옆에 있었을 뿐 아니라 진등은 거대한 뽕 밭이었다. 지금도 히또미가 살았던 집의 주변에는 방공호로 팠던 세 개의 큰 굴이 남아있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어느 마을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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