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간다. 그렇지만 그 돌아가는 세상은 언젠가는 내 의지와 상관있든 없든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음을 어느 날 문득 알게 된다. 어느 곳에서 꽃이 피고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일련의 통과제의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일부만 접할 뿐이다.

꽃피는 춘삼월이다. 올해 3월의 첫날은 추적추적 내린 비로 시작했다. 지난 7일에는 경칩(5일)이 지났음에도 올 겨울 하늘에 남은 마지막 잔설도 내렸다. 삼월은 겨울의 영역이라는 고집 때문인 듯도 싶다. 그런데도 3월을 봄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은 양지녘 명당자리에 눌러 앉아 성질 급하게 피는 꽃들과 시인들의 선수 치는 싯귀 때문이다. 더구나 피부에 닿는 바람이 한 겨울 바람도 아니다. 미지근한 물 온도쯤으로 찬 듯 따뜻한 듯 싶어 굳이 말하자면 계절과 계절사이 환절기라면 맞을까도 싶다.

3월 타령은 봄에 대한 기다림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3월이 되고보니 왜 기다렸는지를 모르겠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지지난 해에도 그랬다. 그렇게 3월은 하루하루 속절없이 또 흘러가고 있다. 다만, 봄의 전갈이 오면 마음속에서 석연치 않게 꿈틀대는 ‘설렘’과 막연한 ‘기대감’ 이 있다. 따스한 햇볕이 그냥 어디든 가라고 분위기를 띄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읽고 보고 꿈꾼 로망이 늦었지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뚱맞는 생각도 돋아난다.

이럴 땐 그간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싶지만 익숙하게 전화 할 사람이 없다. 마음에 사는 사람들은 혹여나 약속 안되면 마음이 다칠까 싶어 주저하고 만다. 머릿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외로울 때는 내키지가 않는다. 그 많은 곳을 다녔어도 선뜩 마음 내키는 곳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와 인연이 묻어 있는 추억을 찾아가기에는 궁상맞을 것 같아 접고 만다.

그리고는 반백의 나이가 그런 생각들은 사치라는 것을 깨닫도록 한다. 외로움이 깊어진다는 것은 나이와 비례한 듯도 싶다. 자제해야 하는 굴레가 너무 많이 생겼다. 지천명의 나이에는 마음(하늘)이 행하는 대로 해도 실수가 없다는데 그렇게 되질 않는다. 세월이 어른이라는 굴레를 씌워 설렘과 기다림은 사치로 치부해 어른인 척 살도록 규제한다. 그래도 마음만은 청춘인데 다람쥐 쳇바퀴 삶이 사회 한 귀퉁이로 내동댕이쳐진 채 존재감 확인을 위한 메아리를 노래할 뿐이다.

내 마지막 기다림의 설렘은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결혼 전 이었던 것 같다. 바쁘다는 것이 일상이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 속에서도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혼자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실감하게 된다. 그런 삶들이 내 주변에 일반화 돼 있음을 알 때는 더 허망하다. 어느 날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장소를 잡으려다 보면 그 많은 식당을 다녔지만 쉬이 떠오르는 식당이 없다. 그 만큼 나는 의식없이 살아 왔다.

어느 날 문득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을 때 덜컥 겁부터 내는 것도 참 야박해졌음을 느낀다. 나의 울타리도 그만큼 좁아졌다. 그러면서도 늘 다른 사람에게서 얻으려 하고, 비교에 목말라 하는 습성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의식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만큼 익숙하지만 속도와 양이 지배할 뿐, 의미나 질문은 가치가 없어 졌다.

기다림에 야박해 지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다. 과거 편지를 쓸 때 어느 종이에 어떤 색깔의 볼펜으로 쓸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약속 장소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이해하고 배려했다. 그땐 젊었고 설레임이 설레발이 되도 용서가 됐다.

그러나 편지를 하고 답장을 기다리는 그런 지루한 시간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전화가 가정집에 보급되고 지금은 핸드폰이 일반화되면서부터다.

이번 봄에는 몇 해고 몇 해고 지나 반가움이 잠시 미소를 짓게 할 그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 한 때 내 삶의 전부였던 그 무언가가 여러 해가 지나 문득 발견될 때 반가움이 지난 삶을 덧칠해 줄수 있도록 말이다. 어느 책 소절에서 어렴풋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지금은 네 인생 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거나 전체 인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나이들어 돌아보면 기억도 나지 않을 그 부분들에 무슨 색칠을 당시에 했던가 싶다. 한가지 색깔로 채워진 도화지보다 형형색색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많이 고통스러워도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다 보면 어느새 여러 색깔로 빛나는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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