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무안읍에서 가장 크지만 마을회관이 없는 마을-성남5리 산성마을

산성마을은 20여 년 전에 성남2리 후청 마을에서 분리 되었다. 성남5리가 차지하는 영역은 무안읍에서 제일 넓고 세대수가 500여세대로 가장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성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읍의 조산인 남산에 성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남산에 있었던 성은 산근산석성 공수산성 또는 남산산성으로 불려지는데 백제시대부터 있어왔던 성이다. 현재 남산 팔각정에 이르는 정상 부분에 석축이 남아있으며 山頂을 중심으로 곳곳에 석축이 잔존해 있다.

산성마을의 영역은 실로 넓다. 약사사 앞 수정아델리움에서 무안읍교회 농산물품질관리원 원불교무안교당 현충탑 선거관리사무소 남악사 광산김씨 사당인 숭현사 새로 건축하고 있는 무안의료보험조합 길 건너서 전신전화국 은광교회 승달맨션 금정아파트 공무원아파트 성남아파트 우체국 경찰서 통일교 등의 기관과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산성마을의 충혼탑 주변에 있는 각종 비

원래 산성마을은 예전 무안읍 교회가 있었던 골짜기이다. 오른쪽으로 매듭산이 있고 왼쪽으로는 국악원이 있었던 마을인데 매우 가난했던 마을이었다. 10여 가구의 집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몇 가구가 살고 있으며 가정환경이 어렵다.

현충탑 아래 주차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이 신사당이라 부르는 이곳은 일본인들이 아주 성스럽게 여겼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공원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차장 위에는 무안전역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선정비 공덕비 등을 모아두었다. 또한 신사당 옆에 정일영씨 2층집이 있었다.

현재 경찰서 건너 주차장 터인데 한때는 무안국악원이 들어섰던 곳이다.

숭현사를 지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남악사는 1942년 정정보씨의 선몽에 의해서 건축된 사찰이다. 어느날 정종보씨가 꿈을 꾸는데 땅에 부처가 묻혀 있어 갑갑하다며 꺼내 달라고 하기에 그 꿈대로 땅 속을 파보니 부처가 누워 있었다. 급하게 꺼내서 지금의 남악사를 짓고 봉안하고 있다.

현재 무안읍 교회가 있는 자리는 원래 동산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그 교회 앞에 나주 정씨들의 ‘월천사지유허비’가 남아있다. 월천사는 월탄 정기수와 월봉 정황수 형제를 배향했던 사당이다.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형제가 의병장이 되어 왜구를 토벌했던 충신들이다.

마을이 넓은 데도 경로당이 없다. 수많은 기관과 500세대가 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도 노인과 주민들이 쉴 수 있는 마을회관이 없는 것이다. 이유를 이장에게 물어봤더니 주민들의 의견을 모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민들 대부분 토박이가 아닌 외지인들이다 보니 함께 모이기가 대단히 어렵고 의견도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 하마비가 있었던 마을-성남6리 하마동

▲ 하마거리

하마동은 1994년 성남3리 만창에서 분리된 마을로 하마비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下馬碑는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이다. 이 하마비가 있었던 곳은 예전 옥천식당 삼거리이다. 하마거리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은 삼거리에 하마비가 있었는데 도로가 나고 주변이 개발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무안에는 향교가 있는 교촌리와 하마거리인 하마동 두 군데에 하마비가 있었다.

황량했던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무안군이 1969년 신안군과 分郡이 되면서 목포에 있었던 무안군청이 현재의 자리인 성동리에 들어서면서다. 정부에서는 그때 무안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서 성남리에 주택을 짓게 되었다. 이른바 공무원주택인데 1970년도부터 이곳 하마동에 40호의 가옥을 짓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하마거리의 주택 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전부 논과 밭 뿐이었다. 공무원 주택에 이어 1990년대에는 승달타워 아파트가 들어서고 이후 전화국이 들어서면서 점차 마을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마거리는 예전에 국도 1호선이 지나갈 정도의 요지여서 한국전쟁 때 인민군 검문소가 있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예전 산림조합과 현재 농수산물 검사소 사이에는 자주 인민재판이 열렸던 곳이 있다. 인민재판이 열리는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주변에는 내무과장 사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 앞으로는 예전의 국도 1호선이 지나갔다. 승달타워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는 안양환씨가 운영한 사료공장이 있었으며 양조장도 있었다. 승달타워 아파트 뒤에는 군에서 운영했던 냉장고가 있는데 개인에게 불하된 뒤에도 그 부근은 개발이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폐허처럼 남아있다.

▲ 5일 시장터인 기왓골 마을-성남7리 와동

▲ 5일 시장이 떠나버린 와동마을전경

와동은 성남5리에서 분리된 마을로 1981년 구장터의 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5일장 부근을 포함하여 산림조합 미목 우성 일봉 아파트가 여기에 해당된다. 남문밖에 있었던 불무제 아래의 구시장은 불어나는 인구수에 비해 너무 좁아 무안군에서 최고의 적지로 찾은 곳이 현재의 이 마을이다. 당시 이곳은 무안군의 용역보고에 따르면 시장지로서는 가능성 활용성 적절성 발전성 등 최고의 적지로 평가를 받았던 곳이다.

당시 군유지였던 이 일대는 처음에 5,000여평의 부지에 시장터가 조성되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자 2,000여평을 개인에게 불하하여 현재는 3,000여평의 부지에 시장이 조성되어 있다. 한때는 시장이 활성화 되어 포목점까지 있었을 정도로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섰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감소와 상권의 다변화로 현재와 같이 시장 주변의 길 가에만 시장이 형성될 뿐 원래의 시장터에는 소비자들의 발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선 건물이 현재 장안슈퍼를 비롯한 15동의 구조물이며 현재도 초창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90년대 무안군에서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으나 예정대로 활성화 되지 않자 농산물 시장을 신설하였다. 하지만 법률적 검토가 미흡해 농산물 시장을 세워놓고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오히려 5일 시장 활성화에 최대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80년대 초창기 시장의 모습은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불무제를 메우기 위해서 무안군에서 발생하는 각종 쓰레기를 갖다가 매립을 하였는데 쓰레기에서 나오는 각종 냄새와 오물은 참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 파리떼의 습격은 상상을 불허했다고 한다. 천장을 보면 새까맣게 파리들이 붙어 있어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은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일부 주민들은 불무제가 메꿔진 것에 대해서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무안읍의 중심에 커다란 방죽을 조성한 것은 풍수적인 비보 사상 때문에 선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인데 개발 우선주의에 밀려 그것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瓦洞이란 지명은 서라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예전에 기와를 구웠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주민들은 서라아파트 자리를 기왓골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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