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날로 발전하라는 마을-성남1리 일신동

현재의 日新洞이란 지명에는 사연이 있다. 원래는 성남리가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1988년에 8개 마을로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후청마을에서 分里되었다. 분리 되면서 마을 이름을 정하게 되었는데 장터거리, 시장통이라는 지금까지의 이름을 버리고 ‘성남리 일번지’라는 뜻인 城一洞으로 주민들은 하자고 했으나 읍사무소에서는 특정인의 이름이 생각난다 하여 무시하였다. 그리고는 주민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日新洞의 의미는 날로 발전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마을의 입향조나 입향연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의 마을회관은 分里되면서 주민들의 모금으로 1988년에 건립되었다. 이 마을의 구역은 무안신협과 파크랜드부터 서울약국 매일시장을 거쳐 불무제 다리까지이다. 매일시장은 하천이 복개되어 이루어졌는데 낙지골목처럼 하천이 있었던 곳을 경계로 한쪽은 성남1리이고 맞은편은 성남2리에 해당된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5일 시장을 포함한 주조장도 있었고 방앗간 도살장까지 있었다. 하천 건너에 있었던 도살장은 현재의 동남호텔로 옮겼다가 청계면 서호리로 이전했으나 현재는 운영을 않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기관으로는 목포수협무안지소만 있을 뿐이다.

▲ 예전의 불무다리 지금은 회전교차로가 들어서 있다

1770년대부터 문헌에 보이는 무안의 시장은 무안邑城 內인 현재 무안읍사무소 앞에서 형성되어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해방이후 1948년 무렵에 현재의 불무제 아래인 시장통으로 옮긴 것이다. 시장통은 조선시대 읍성의 해자였던 하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으며 주민들은 장터거리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수용을 못하자 1981년 현재의 와동 장터로 옮겼다. 하지만 이 장터도 시장의 현대화란 미명하에 곧 옮길 예정이다.

이 마을에는 쪼빡샘(금영노래방 주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근래까지 남아있었으나 1985년 소도읍 가꾸기 때 없어졌다. 이 샘은 깨끗하고 맛이 좋았으며 물의 양이 많아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외지 사람들이 무안에 오면 농협군지부의 자리에 있었던 월성식당의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하였는데 이 우물을 가지고 요리하였기 때문에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물은 서울약국 뒤 엘지 전자 옆으로 조그만 개울을 이루며 불무제 하천까지 흘렀는데 지금은 복개가 되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성동저수지에서 흐르는 물이 버스터미널 뒤 낙지골목을 지나 현재 매일시장 터를 거쳐서 불무교까지 개울을 이루고 흘렀는데 1970년대에 복개하여 도로와 상가로 활용하고 있다.

▲ 마을 재산이 많은 부자 마을-성남2리 후청

▲ 후청동 마을의 당산제 제단

무안읍성이 축조되면서 ‘남문밖’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월두회집, 삼성전자가 있는 자리에 석장승 4개,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목장승 2개 그리고 5-6개의 선정비가 길 가에 세워져 있어서 장승백이라고 불렀다. 또한 장승백이 길옆에는 두 칸짜리의 동각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했다.

장승백이에 세워져 있던 두 쌍의 석장승(동방대장군, 서방대장군으로 음각되어 있음) 중 한 쌍은 무안군청 앞에 버려져 있다가 현재는 체육공원의 충혼탑 앞으로 옮겨 우리 지역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들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당산제가 있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 의례로 당산굿·동제(洞祭)·당제(堂祭)라고도 한다. 제일(祭日)은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이루어지는데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를 모시는 당묘 자리에는 두 군데의 제단이 있는데 큰 제단에서는 당제의 원래 목적인 마을의 평안과 화합을 위해서이고 다른 작은 무덤의 제단은 후손이 없는 할머니를 위한 제사이다. 이 할머니의 무덤은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다. 할머니는 평생을 홀로 살았는데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밭 세마지기를 마을에 기증하면서 뒷일을 부탁하여 그 유지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밭과 묘 터가 무안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학교부지로 편입돼 보상을 받고 옮겨서 현재는 중사지 앞의 산에 모셔졌다.

당제를 지내는 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마을종이 수십 년 역사를 묵묵히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구리로 만들어진 종은 요즘처럼 마이크 시설이 있기 전 마을의 대소사를 알리는 일종의 통신시설이었다. 얼마 전까지 종을 보호하는 양철 덮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후청마을의 역사에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다. 한 명은 정일영씨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소유했던 사람으로 아버지가 정준회다. 이 집은 나중에 김두천씨에게로 넘어가 베 짜는 공장으로 운영되었다. 서울에서 시계방 운영으로 큰돈을 벌었던 김두천씨는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무안으로 내려와서 베 짜는 공장을 운영하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후유증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던 공장은 망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이후 이 집은 몽탄 사람 최병영씨에게로 넘어갔다.

▲ 예전의 정일영씨집 지금은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양길영이다. 이 사람은 현재 시민약국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서울시계포가 자리한 곳까지 땅을 소유했는데 그곳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였던 사람이다. 부자였고 씀씀이가 좋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조약방 조규종씨다. 정일영씨 집 옆에서 조그맣게 한약방을 운영했으나 매일 들어오는 현금은 500만원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조규종씨는 원래 경찰이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잘 되자 바로 그만 두었다.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운영했던 적이 있어서 한약 조제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산부인과 전문으로 애기를 낳지 못하는 전국의 어머니들이 찾아왔다. 얼마나 사람들이 몰렸던지 며칠을 기다려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규종씨는 초기에는 무척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돈을 벌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 지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 마을에는 새마을금고와 사찰인 무상사가 들어있다. 또한 각종 가게와 모텔 식당 한의원 내과 학원 등이 들어서 있어 무안읍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기도 하다. 일부 낙지골목도 영역에 속한다. 1931년에 세워진 ‘정준회시혜불망비’가 후청광장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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