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 ▲ 곰솔과 약샘, 그리고 인바위가 있는 꿩 형국의 마을-망운면 송현1리 두모

두모는 월곡과 함께 송현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큰 마을 작은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작은 마을에 해당되는 월곡은 200여년 전에 파평윤씨 月谷 윤상은 윤참봉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윤은보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하나 마을 앞 파평윤씨 집안의 무덤에 있는 비문과 월곡이라는 마을이름을 볼 때 윤상은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파평윤씨의 족보를 볼 수 없어서 더 이상의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마을 앞에는 재잣등이라는 산이 있으며 산 아래에 확골이라는 들이 있다.

큰 마을에 해당하는 두모 마을은 김해김씨 金瑞甫(1584 - 1642)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터를 닦은 연대는 경상도 김해에서 이곳으로 온 16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 주변의 풍광과 풍수적인 지형을 봤을 때 좋은 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인바윗등의 고인돌

마을의 중앙에 해당되는 능선에 수형이 잘 잡힌 곰솔 두 그루가 있다. 1994년 문화재로 지정될 때는 네 그루였는데 그 동안 두 그루가 죽어 현재는 두 그루만 남았다.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의 풍수적 지형인 꿩을 솔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방패막이로 심었다고 한다.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센 까닭에 곰솔이라고 부르며,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른다. 또 줄기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었던 나무로 400여년 전에 입향조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천연기념물인 두모마을의 당산나무

조선시대까지는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 때는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백중날에 다시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곰솔은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신성시 여기는 나무로 낙엽도 함부로 채취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주민 중 한 사람이 쟁기로 밭을 갈다가 성에가 부러지는 바람에 성에에 쓸 나무를 이 곰솔 가지를 잘라 대신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急死를 당한 일이 있었다. 또한 여름철에 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면 개미나 깔따구 모기 등 벌레들이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 공알바위와 곰솔나무
월곡 마을 뒤에는 바다에서 민물이 솟아나는 유명한 약샘이 있다. 장마가 들 땐 이 물에서 민물 장어도 잡혔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메워져 있다. 유두날이나 칠석 백중날이 되면 외지에서 이 물을 이용하여 해수찜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여름철의 땀띠는 물론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나 함평 영광은 물론 멀리 서울에서 오기도 한 것이다.

마을에 조개무덤이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자료를 보면 해안가 농지에서 패총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밭과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패각류가 노출되어 있었으며 백자편 옹기편이 수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그곳의 조개를 빻아서 비료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묘지를 조성하는데도 사용해버려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인 도로 옆에는 고인돌 4기가 모여 있는데 주민들은 이 바위를 印바위라 부른다. 인바위는 고려태조인 왕건의 숙부 왕망과 관련된 설화가 있으며 고이도의 왕산 설화와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 바위에 공을 들이기도 했는데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원을 하기도 했다.

▲ 일제시대 망운 비행장으로 인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을-송현2리 용동

▲ 배나무정-파평윤씨세장비가 있다

용동 마을은 망운면소재지에서 운남면 방면으로 3㎞ 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망운-운남 간 도로 옆에 형성되어 있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망운면 송현2리 용동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용동’ 마을 이름의 유래를 ‘마을의 형태가 용이 S자 모양으로 누워있는 것처럼 길쭉하게 생겼다하여 용골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龍洞으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와는 다르게 알고 있었다. 유래지에서는 ‘약 180여 년 전 이곳에서 가까운 함평의 손, 이, 김 씨 등이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이곳의 평야가 기름진 것을 알고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년 전에 김해 김씨 김원창씨가 함평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다니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여기고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그 분의 직계 후손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이 속한 행정단위가 솔치고개[松峴里]라고 할 정도로 이곳은 일제시대까지만 하여도 소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주민들은 낮에도 나들이를 삼갈 정도로 울창한 수풀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말 일본인들이 망운 비행장에서 사용하는 비행기 기름을 만든다고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대규모 벌목을 하면서 이 일대가 빨간 황토빛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실지로 당시 마을에서는 송진 기름을 만들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꽃회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일제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 시대에 이 마을에는 꽃 회사와 박하농장이라는 두 개의 큰 공장이 있었다. 바로 옆에 망운 비행장이 있어서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운반할 수 있는 수송 능력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일제 때는 이 마을 주변 일대에 꽃과 박하가 널리 재배 되었다.

용동에서 원송현으로 들어가는 망운 서교(현재는 폐교) 입구에 ‘물레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과거에는 밭이었다. 물레는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수공업적인 도구로 시골에서는 중요한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물레등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물레돌이라 하는 것으로서 한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마을에 일이 있고서 부터는 신성시 여기는 돌이 되었다. 물레돌은 물레가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와 물레틀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가롯대 위에 놓여지는 넓적한 돌이다.

운남 쪽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배나무정이라는 곳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큰 배나무와 모과나무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과거에는 수풀이 우거진 으슥한 곳이어서 주민들이 접근하기를 꺼려했던 곳으로 이곳을 지나 다니던 사람들이 소나무를 꺾어서 놓고 지나가던 서낭당도 있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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