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안문화원장 백창석
[무안신문] ▲ 무안에선 유일한 선산임씨 동족의 마을-당호1리 원당호

당호1리는 고개를 사이에 두고 원당호와 학전동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중 鶴田洞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소쿠리 모양의 형국이다. 뒷산은 학머리와 날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집들이 마치 학의 알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뒷산 너머에는 학을 부른다는 일로읍 상신기리 환학동 마을이다. 실지로 이 마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선산임씨 林壹齡(자-경수, 호-월정. 1508-1588)이다. 공은 사마시에 합격해서 진위 현령을 역임한 선비다. 원래 영암 서호면에서 세거했으나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자손들이 번창할 수 있겠구나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유래지는 공의 아버지인 林遇利(자-문겸, 호-유재. 1476-1529)가 입향조라 하였으나 주민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들인 일령공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영암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이 마을로 이장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 원당호 마을에 있는 효자각

당호는 학전동과 당호로 당호재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당호1리에 속한 마을이다. 모두 선산임씨 집성촌으로 당호가 큰집 학전동이 작은집의 마을이라고 한다. 해서 다른 성씨가 들어와 살기는 무척 어려웠다.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얼마 살지 못하고 이사해 버렸다고 한다. 이 마을도 영산강변의 다른 마을과 같이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매우 어렵게 살았다. 농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 葛花浮水의 칡꽃명당 마을-당호2리 갈산

▲ 갈산 마을에만 있는 충주박씨들의 족보

갈산은 당호2리에 속하는 마을로 용산마을과 행정구역을 같이 한다. 葛山이란 지명의 유래는 풍수지리에서 비롯된다. 이 마을의 형국을 보면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반도형으로 마치 길다란 통나무가 물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옛날 이름 있는 지관들이 조상을 모시는 명당을 찾기 위해 승달산을 타고 내려 와 터를 잡은 葛花浮水의 칡꽃명당이라 하여 葛山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는 갈산이란 지명이 좋지 않다하여 옥산으로 바꿨다가 다시 현재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龍山은 갈산 마을 아래에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는 땅골로 불렀다. 땅골은 땅 끝의 골짜기라는 의미로 용산에는 작은 땅골과 큰 땅골이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도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고작산의 한 맥이 영산강을 향해 뻗어있어 마치 龍의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 마을은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의 고향이다. 나주임씨로 국회의원을 지낸 임종기씨와 보해양조를 세운 임광행씨이다.

마을 앞은 영산강 간척으로 인한 널따란 들판이 있고 오른쪽엔 일로읍 복용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우산과 개꿀재 주변의 고작산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부유하게 살았으나 영산강 둑이 막히면서 예전보다 훨씬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앞에 기본 전답이 있고 영산강에서 잡아들이는 수산물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마을 뒤에는 당호저수지에서 일로읍 영화농장으로 연결되는 수로인 굴이 뚫려 있다. 공수굴은 당호저수지와 함께 소화 7년(1932년)에 만들었는데 그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이었다. 하지만 ‘唐湖’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지명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저수지를 중국 사람이 와서 막았다는 내용은 예견지명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마을은 맞은편에 있는 일로읍 복용4리 양도 마을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 마을의 뒷산에 칡이 많이 있다 해서 갈산이라 했는데, 맞은 편 마을에는 칡넝쿨을 즐겨 먹는 염소 형국의 양도(羊島)라는 마을이 있다. 이 두 마을이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관계여서 한 곳이 흥하면 다른 곳은 약해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지로 그렇게 느끼냐는 질문에 주민들은 웃기만 한다.

▲ 취련당이 있는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당호3리 신흥동

▲ 신흥동에 있는 나주임씨 임위의 취련당

신흥동은 당호3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려봉을 주산으로 하고 좌로는 동산과 우로는 앞산으로 둘러싸인 와우형의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널따란 영산강 간척지가 펼쳐져 있어 개방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을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 주변에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 편안함과 아늑함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신흥동은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나주임씨 입향조가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왔던 나주임씨 林 瑋(자-平仲, 호-東里. 1597-1668)는 柳湖 林 悏의 둘째 아들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성품이 침잠순후하고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다. 학문이 높았음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늘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마을에 취련당을 짓고 기거하면서 형인 목사공 몽촌 임타가 있는 일로읍 회산의 관해정에 오고가며 정을 나누었다. 자료에는 ‘신흥동과 회산은 牛鳴地(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위가 지었던 취련당은 6칸 팔작지붕의 저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堂號도 없어지고 사랑채가 뜯겼으며 몸채를 현대식으로 개축하는 등 형태가 많이 변하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과거 양반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사랑채는 그 구조와 배치가 독특하다.

나주임씨가 물러나고 이후에 들어온 사람이 밀양박씨 박연우(자-원택, 호-매산. 1883-1943)이다. 공은 이웃 마을 일로읍 복룡리 사교 마을에서 이주하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마을일을 보면서 농산물 경작부분에서 전라남도 1등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개꿀재(일로읍 복룡리 사교마을에서는 元驪峰이라 부르고 있다)를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이 펼쳐져 있으며 좌우로 맥을 갖추고 있어 전형적인 소쿠리형의 구조다. 마을 주변의 산림이 개발이 되기 전에는 배산임수의 아늑한 풍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경작할 땅이 없어 매우 힘든 지역이기도 했다. 낮에는 강에서 맛과 게를 잡고 저녁에는 가마니를 짜 어렵게 생활을 해온 것이다. 마을 풍경만 보고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도 10년을 넘어서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변 환경이 열악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몽탄에서 목포로 가는 기찻길에는 두 개의 재가 있었다. 이 마을 뒤의 개꿀재와 삼향읍 용포리의 무너미재다. 이들에게는 일제강점기 때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꿀재는 철도공사를 하는데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바위가 없는 흙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공사를 했는데 파고 보니 바위 투성이었다. 바위를 파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굴은 내지 못하고 주변을 파 협곡을 만들어 철로를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진짜 굴이 있는 재가 아니라 거짓굴의 재라 해서 개꿀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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