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신문]최근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연주된 ‘This is Arirang’(이것이 아리랑이다) 영상을 보내왔다. 사연을 읽고 본 영상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한 외국인이 아리랑을 듣고 싶어 한국에서도 가장 한국적이라는 인사동에 들렀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아리랑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기획하여 40여명의 연주자들을 한 명씩 섭외 구성한 오케스트라로 인사동거리 한 복판에서 ‘아리랑’을 연주한 동영상이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은 우리나라 선조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중 하나이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즐겁고, 어떤 리듬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감정이 달라지는 요술같은 노래이다. 아리랑 후렴구는 살리고 개작도 많이 이루어져 울리고 웃기기도 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아리랑의 기원이나 어원을 두고 다양한 견해만 제기되고 있을 뿐, ‘아리랑’과 ‘아라리’가 무슨 뜻인지 공인된 것은 없다. 다만, 아리랑의 최초 기록은 조선을 다녀간 미국인 헐버트 선교사가 채보해 1896년 미국의 음악잡지에 실린 음악 악보와 그 소개 내용이처음이다. 이를 근거로 보면 아리랑은 이미 조선시대 오래전부터 유행됐다고 짐작되는 일종의 서민들의 한풀이 공감을 가진 노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노래의 사설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고, 누가 이 마음을 알리오’ 등 회한 내지 자탄(自嘆)을 우리 민족적 리듬에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담아냈다는 것이 쉽게 공감을 얻는 장점이다.

‘아리랑’ 의미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전국에서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집과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벙어리나 귀먹어리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아이롱(啞而聾·我耳聾)’으로 불렀다는 설, 나의 어려움을 표현한 ‘아난리(我難離)’, 이별한 여자(랑)을 표현한 ‘아리랑(我離娘)’ 등 분분하다. 익숙하고 단순화된 형식에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즉흥성이 더해져 누구든지 어떤 사연이라도 기능과 무관하게 노래할 수 있게 했다.

아리랑은 지역성, 대중성, 역동성을 갖추었고 전국적인 민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적인 정서를 공감하고 공유한 상태에서 어떤 사회적 사건으로 인한 역동적 흐름을 탔기 때문이다. 조선 말 시대상으로 볼 때 동학농민운동과 의병활동의 전국적 여파로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그런 사람들에 의해 아리랑이 각색돼 다양한 지방 아리랑이 생산됐다고 보여진다. 함경도 원산 지방의 「신고산타령」, 「정선아라리」를 비롯한 강원도 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이 대표적 이다. 특히, 서민적인 민요로 정착하면서 농민과 여성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주된 사용자로 정착해 파급이 쉬웠다.

특히, 아리랑의 생명력은 단순히 사회 변화를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위기와 고난에서 힘을 발휘하는 비관적인 삶을 해학적으로 전개한다는 점이다. 해학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형상화하거나 비판적으로 사회정신을 이끄는 적극적이고 중요한 구실을 감당했다. 따라서 아리랑은 고정된 하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개인적 경험이 집단의 공감을 얻어 근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민족의 시련을 집약 전달하면서 세태 풍자를 고취하는 민족·민중의식의 노래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지역의 ‘품바’와도 상충된다. 타령으로 부르는 품바도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를 반복적으로 구사하면서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해학과 풍자로 비판했다.

‘아리랑’과 ‘품바’는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고 안정감을 찾는 자족적 기능과 적극적인 의사소통적 기능 등을 통해 민중의식의 역사적 성장과 더불어 발전했다.

한 사회를 둘러싼 갈등과 모순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근엄하게 관조적으로 추상화하거나 냉소적으로 회피하는 방법으로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현실 한가운데 서서 구체적 의미를 유지하면서 사태를 대상화하고 총체적으로 인식하도록 깨우치되, 역설과 해학의 어조를 유지하면서 문제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아리랑의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기만 하다. 골방에 갇힌 현대시를 불러내고 박제된 옛노래에 숨결을 불어넣어 공동체의 이상을 대변할 현대판 아리랑을 꿈꾼다.

무엇보다 ‘아리랑’이 전국 단위 노래로서 보여준 것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 장수비결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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