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은 2015년 새 달력의 표지로 매달려 있다. 세월의 속도는 나이와 같이 간다고 했듯이 실감이 난다. 요즘 각종 모임마다 송년회를 쫓아다니다 보니 연초 세웠던 계획들은 못 마시는 술잔 속에서 삭아지고 만다. 언론들마저 발 빠르게 내년은 66일이 공휴일이고 연휴 등을 셈하며 올해를 이미 보내 버렸다.

주변을 돌아보면 도무지 천천히 가는 것들이 없다. 가을이나 싶더니 겨울이고, 하루가 시작되면 덤벙대다가 속절없이 지나간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쳇바퀴 생활을 하면서 내일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망상을 꿈꾼다. 그 와중에 챙겨야 하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다음을 쫓아가고 있는 모습이 실속은 없다.

가을은 지난 주말 비가 내린 뒤 겨울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주었다. 얽이고 설킨 일상을 잠시나마 털고자 이번 주말에도 가까운 산을 찾았다. 세파에 닿아 뼈만 남은 돌길과 흙길로 이어지는 등산로 옆 소나무와 참나무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반면 음지를 거쳐 계곡을 타고 올라와 스치는 바람은 차다.

비가 내린 후 산행은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산 정상에서 보는 주변 경관도 다르다. 이런 광경을 카메라야 담지만 과학이 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게 사진의 한계다. 등산로에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뇌속에 잠재돼 있던 시구가 절로 나온다. 평생 머릿속에서만 살았던 상상 속의 여인 시몬을 위해 시를 썼다는 구르몽의 ‘낙엽’ 은 젊은 날, 읊조려 보지 않은 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시간이 남아 법천사에 들렀다. 고려 인종때(1122년) 원나라 원명이 승달산에서 교세를 크게 떨쳤고 그의 제자 500여명이 모두 득도했다하여 불리게 된 승달산 법천사는 한때 해남 대흥사를 포함할 만큼 장세가 컸다. 그러나 지금은 대흥사의 말사에 불과하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불 타고, 다시 지어진 사찰이 고풍스럼은 덜하지만 처마밑 단청은 나름대로 멋이 있다.

숲속의 미동에 눈길을 돌리자 인기척에 놀란 청설모가 도토리를 챙겨들고 달아난다. 겨울나기 월동채비인 모양이다.

오는 7일은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이다. 지난 1일은 지역에 첫눈이 내렸고 엄동설한 겨울이 깊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반면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는데 경기침체로 인심을 나눌 여력이 줄면서 서민과 복지사각 지대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날짐승에게 까지 실천했었다. 배고팠지만 ‘까치밥’을 남겨두는 아량은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앞서는 베품정신이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의 발달과 산업화로 빨리빨리와 편리함으로 물질적 풍요는 누리지만 정신적 행복지수는 과거 보다 낮아지고 있다고들 말한다.

올해는 유난히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고 싶은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다. 이럴 땐 시간여행이라도 된다면 미래의 행복을 빌려 쓸 수도 있으련만 삶은 만약이 없다는 게 아쉽다. 그래서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 미래로 시간을 거슬러 가는 독특한 방식이 가능해 대리만족을 준다.

며칠 전 아들의 추천으로 영화 ‘인터스텔라’를 아내와 함께 관람했다.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나 미래로 날아가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스토리가 흥미롭다. 시간을 거슬러가는 행성 방문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1905년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바뀌면서 이론적으로 가능해졌다.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초속 30만㎞)로 날아가는 우주선 내 시간은 지구보다 천천히 흐른다. 현재의 기술로는 광속으로 날아갈 우주선을 만들 수 없지만 블랙홀, 화이트홀, 웜홀이라는 새로운 개념 속 상상력에서는 ‘시간여행’이 가능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사람들의 개발이 불러오는 지구의 대재앙의 종말도 그려 놨다. 최후 식량인 옥수수마저 모래 폭풍으로 못 짓게 되는 지구의 미래를 보면서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천천히 가는 연습을 했으면 싶다. 편리함의 미명하에 날로 발전하는 과학을 통해 생산되는 것들은 당장은 편리하지만 결국은 우리를 옭아 메는 부메랑의 덫으로 돌아온다. 요즘 기후변화가 대표적인 일례라는 생각이다. 지구의 47억년 역사보다 최근 50년의 역사가 지구를 변화를 크게 가져왔다고 볼때 앞으로 50년 후의 지구에는 무엇이 남고 어떻게 변할지 상상조차 어렵다. 결국 과학이 미래의 삶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거는 우리는 후손들에게 모두 죄인일 수 있다. 때문에 후손들의 자연을 빌려 쓰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개발하고 고민할 땅과 자연을 남겨 두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낮추고 주위를 살피며 함께 살아감을 느꼈으면 한다. 주머니가 여유롭다면 나눔의 행복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가진 자, 기득권층. 그리고 저명인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확산이 그립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낮은 곳에서 조용히 나눔으로 따뜻함을 전해 주는 사람들도 많다. 운남지역 사회단체는 관내 불우 소년에게 보금자리 집을 지어 주기로 했고, 한 사업가는 전자제품 일체 지원을 약속했다. 또 독지가들의 쌀 기부와 김치를 담궈 불우이웃에 나눠 주는 사회단체도 늘고 있다. 용돈을 아껴 노인정에 양말을 사서 기증하는 자매 학생의 이야기도 이 겨울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이들의 훈훈한 울림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이어져 사각지대의 빛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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