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남 발행인

▲ 발행인 박금남
“죽은 여인보다 불쌍한 여인은/ 잊어진 여인입니다/” 젊은 시절 감정깨나 있다던 남녀 여인들 간에 읊조렸던 마리 로랑생이 썼다는 ‘잊어진 여인’의 마지막 시 구절이다. 잊어짐과 관련해 국내 시인으로는 김춘수 시인의 ‘물망초’가 떠오른다.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 올듯도 한/ 그러면서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잔날 우리들의 그날/ 나를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따라 더욱 가까이 들리네/ 들리네/ 물망초 전문이다.

감성적인 시들로 저변에는 잊어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다. 치매가 무섭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가족과 지인을 몰라본다는 것이다. 곧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어버림 때문에 상상하기도 싫다.

지난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반년이다. 그리움으로 지쳐버린 유가족들에게 계절이 두 차례나 바뀌면서 두꺼운 외투가 필요한 계절이 됐지만 남기고간 상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설상가상, 지난 17일에는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야외광장 환풍구 덮개 붕괴사고로 공연을 관람하던 시민 27명이 18.7m 아래로 추락, 1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들 사고 모두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대형참사지만 후자의 경우 왠지 조용하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몇 십명 죽음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아닐까하는 인명경시 우려감마저 든다.

전자의 사고는 어른들에 의한 아이들의 죽음이었다. 후자는 행사주최측과 부주의에 의한 어른들의 죽음이 많았다. 어른과 아이들의 죽음으로 갈리지만 후자 역시 30, 40대 사망자에게는 어린 자녀가 있고 이들 가족에게 이날 사고는 청천벽력 같은 절망으로 보자면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는 책임소재이다. 진정으로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책임 떠넘기기로 일관하는 것과 달리 책임을 지는 사람은 선량들이라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안산 단원고 교감 선생님이 책임에 대한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했고, 이번 환풍기 추락사고에서도 30대 행사 담당자가 책임을 지고 처자식을 남겨둔 채 자살했다.

그런데도 안산 단원고 학생 261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은 반년 동안 이뤄진 것이 거의 없다. 수학여행 간다며 부모에게 손 흔들고 떠났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 품에서 영영 떠났다. 그리고 아직도 10명(학생 5명·일반인 3명·교사 2명)은 차가운 바닷속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기다리는 실종자 10명의 가족들은 난방도 되지 않는 체육관 바닥에 담요와 이불을 겹겹이 쌓아놓고서 반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반년처럼 보내면서 국민들에게 잊어질까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반면, 정부와 정치권이 약속했던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대책은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 걸음이고 자세히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무능함만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특히,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의 유가족 외면과 국회 파행 등 정치권의 대립은 극심한 여론 분열을 일으키면서 사회 전반에 더 큰 상처를 냈다.

그나마 다행은 지난 9월 30일 특검후보군 추천과 관련, 여야가 4명의 후보군을 양당 합의로 특검후보추천위에 추천하고, 이달 말까지 처리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여야가 한 걸음씩 물러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마무리 지어 유가족의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

재판 과정으로 본 세월호 참사는 예견된 인재였다. 무리한 증·개축에 따른 복원성 약화, 과적, 부실한 고박, 선원정신 부재, 경제적인 논리만으로 세월호를 운항한 청해진해운의 그릇된 기업 윤리 등이 인재임을 증명하고 있다. 재판부는 상식에 맞는 판결로 유가족을 억울하지 않게 했으면 싶다. 팽목항에서의 유가족들의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억울함을 이해한다면 말이다.

요즘 일각에서는 세월호 얘기는 ‘이제 지겹다’는 말도 팽배하다. 오랜 경기침체 속에서 언제까지나 세월호에 메어 있어야 하는지, 산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망각의 세월 속에서도 잊어야 하는 것들이 있고 기억해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한민국 사회가 정의가 진실이 되는 세상이 열릴 것 같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관심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처럼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네 자식들이 이유없이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세상을 떠났고, 또 그 잘못을 저지른 대상에 대해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우리 민족이 냄비근성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언론도 100일, 200일, 한 달이나 두 달 등 특별한 날이 돼야만 기념일처럼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제는 접고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가을의 중턱을 넘어 겨울로 달리고 있다. 떨어지는 잎들, 뒹구는 낙엽들, 황량하게 텅빈 들판, 망망대해 등등 외로움과 그리움은 적막함에서 더욱 커진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의 울분은 많이 삭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이유없는 죽음과 이유없이 세상을 떠나보내고 그리워 하는 그들의 부모와 유가족들의 아픔이다. 망각은 내가 또 누군에겐가 고립되어 간다는 것 일진데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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