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속일 수 없다. 가을을 여는 9월이 지나고 10월이 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낮이 점점 짧아짐을 느낀다.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 긴팔 옷을 꺼내 입으면서 세월은 유수(流水)같다고 하던 옛 어른들의 말이 떠올랐다.

금년 절기는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가을이 빨리 달려왔음을 달력이 먼저 알려 주면서 올해도 벌써 다 지나갔나 싶어 한숨부터 나온다.

책상에 앉으면 아무 생각 없이 달력에 눈길이 자주 가는 것도 아쉬움이 남아 있음이다.

문제는 가을이 되면서 이상하게 기분이 처진다.

막연히 갈 곳도 없으면서 어디든 가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그 곳을 다녀온들 허전함은 채워지지가 않는다.

분명 하늘은 맑고 날씨는 청량하고 좋은데, 기분은 화창하지가 않다.

이런 현상을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한다는데 가을을 타는 것일까?. 과학적으로는 기분 처짐이 일조량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절기상 추분이 지나면 낮의 길이가 짧아져 햇볕을 접할 기회가 줄어 가을 우울증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때문인지 요즘 들어 7080 노래가 정겹다.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가 저절로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하고 7080 CD도 구비해 자동차에서 듣는 횟수도 늘었다.

내용이 가을을 주제로 인생의 깊이가 묻어 있는 노랫말들로 꾸며져서 더욱 그렇다.

대부분 젊은 시절에는 의미 없이 그냥 스쳤던 노래가 내 나이 반백이 되면서 세삼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시쳇말로 가을을 타는 지 말이다.

내나이 묻지마세요/내이름도 묻지마세요/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부질없는 것/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그냥 쉬었다가세요/술이나 한잔하면서/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다 잊으시구려(방실씨 노래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정승호 시인 ‘수선화’ 중)

사람은 원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움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듯 싶다. 사람이니까 외로울 수밖에 없고,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 같다.

얼마 전 청계-무안공항간 4차선 확장공사 구간에서 4세기 고인돌이 대거 발견됐다고 해서 현장을 가본 적이 있다. 고인돌묘 어디에도 사람의 뼈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 발굴된 거대한 옹관묘 속에도 흙만 가득할 뿐 유골의 흔적은 없었다. 인생무상이다. 수천년이 지나면 나 또한 그리고 현실을 아둥마둥 살아가는 모든 이들도 한줌의 흙으로 녹아들 텐데…

어찌됐든 가을은 잔인한 계절이다. 분명 하늘은 맑고 청량하며 가을의 풍족한 은총을 내리고 있지만 순간순간 마음이 무너지고 심란함이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아주 오래전 유독 슬픈 것들이 많이 떠오르는가 보다. 요즘 자주 보는 석양도 더욱 붉어 보이는 것도 가을 탓인가 싶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이 떠오른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해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이 수필은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마음을 뒤흔들며 감상주의에 빠지게도 했다. 세월이 흘러 최근 다시 읽어 본 이 수필은 감상주의보다는 인생의 허무함이 잘 배어있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것 중 하나는 꽃보다 열매가 더 좋아 보임도 느낀다.

길을 가다가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를 보면 지난 여름의 풍파 속에서도 기꺼이 참고 견뎌 열매를 맺은 대견함 때문이다. 또 나이를 들면서 내가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 졌으며. 조금 더 기다릴 줄 알게 됐다. 고통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지나갈 것임을 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이미 내가 중년의 문턱에 서 있음을 세월이 가르쳐 준 스승이다.

요즘 우리를 슬프게 하는 주변의 것들이 너무 많다. 민생을 팽개쳐 두고 정쟁으로 허송세월하는 정치권이 슬픔을 제공하는 으뜸이다.

정기국회가 개원한 지 한달이 됐지만 공전중인 상황을 보면 도대체 국민들의 슬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하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도 5개월이 지나도록 치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계층간 이해관계에 얽혀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도 슬프다. 스러져간 젊은 영혼들을 외면한 채 여야는 그들만의 리그전으로 여전히 제 갈길로 행진중이다.

이런 사이에 정부는 담뱃값, 주민세, 자동차세 등등 세금은 줄줄이 인상하겠다고 한다. 겉으론 복지를 위해 세수를 확보하는 것처럼 외치고 있다.

이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것들로 세월은 가고 있다. 가을보다 더 삭막한 겨울로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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