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금남 발행인
올해 초쯤으로 기억한다.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아들간 대화 중에 딸이 아들보고 ‘너 일베 아니야?’ 하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들 사이에서 그 후로도 ‘일베’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들 간의 ‘은어’나 요즘 젊은 사람들, 학생들 사이에서 말을 축약해 사용하는 단어쯤으로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세상이 온통 확인되지 않는 말들이 난무할 때 쯤 ‘일베’라는 말이 신문, 방송에도 나오면서 ‘일간베스트저장소’의 축약한 말임을 뒤 늦게 알게된 나의 무지였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일베’들의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말과 행동을 가십거리로 살아가는 세상이 됐다.

최근에는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유족들 앞에서 음식을 먹는 ‘폭식 투쟁’을 벌였다. 또한, 유족들 앞에서 노래를 틀고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일베충’ 표현에 빗대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유족충’이라고 하는가하면 일부 누리꾼 사이에는 ‘쥐명박, 닭근혜, 노알라, 핵대중’ 등 보수와 개혁성향 전 대통령들 조롱 단어도 흔치 않게 보인다. ‘조롱’의 한계가 넘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그러나 조롱행위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치 체제에서 권력에 직접 도전이 어려울 때 ‘조롱’은 풍자나 해학 등과 유사한 의미로 강자나 권력을 향해 간접적 표현수단으로 그 힘을 발휘해 왔다.

그 대상이 강자와 권력자이기에 조롱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조롱하고 풍자해도 어차피 그들은 강자와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조롱’은 일베의 폭식처럼 무차별적으로 힘없는 약자까지 대상으로 삼아 돌팔매질하는 행위로 이어지고 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약자를 향한 ‘정신적 테러’, ‘증오범죄’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일베뿐 아니라 온라인 토론장 댓글부터 저명한 논객들의 토론까지 인격비하 ‘조롱’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용인돼 횡행한다. 급기야 ‘조롱’이 비인간적 패륜으로 변질돼 최근에는 인격살인을 넘나드는 수준으로 만연됐고 자살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여기에는 도덕가치가 상실된 사회,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가 상실된 우리 사회의 면모가 숨어 있다.

‘일베’들의 ‘조롱문화’를 열어준 것은 인터넷이 산파 역할을 했다. 2000년대부터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을 중심으로 같은 관심사를 지닌 이들이 결집해 소통할 토대가 마련됐다.

익명성과 집단의 가면 뒤에 숨어 상대방을 비하하고 공격하는 행태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조롱’은 쉽게 주목을 끌고 판세를 뒤집는 도구로도 애용되게 됐다.

온라인 공간은 토론문화가 정착돼 있지 않아 상호 다른 의견을 교환하고 합의점을 찾기보다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글이 가능하다.

때문에 내 의견을 가장 극단적인 태도와 언어로 지지세력에게 보여줘 주목받고자 더욱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SNS 발달로 자신과 같은 생각을 지닌 지지자들을 접하면서 옳지 않은 자기 의견도 타당할 수 있고 지지받을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을 통해 조롱 문화가 확산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은 사라지고 상대를 향한 비방만 남는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남을 조롱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 인간들을 ‘호모 조롱투스’라고 지칭하는 말도 나왔을까 싶다.

하지만 일베 출현에는 정치나 국민 모두가 반성해 볼 필요도 있다.

노력해도 사회에서 외면당하다 보니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다른 이들의 약점을 잡아 비하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출현감도 없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기중심적으로 타인, 약자에 대한 배려나 예절,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은 필요 없게 됐고, 사회적 합의인 옳고 그름, 선과 악의 최소한의 보편 가치기준마저 잃어 버린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롱문화는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서 나왔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토론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국정을 이끌어야 할 국회가 상호 의원간 조롱하고 극단적 정치 갈등의 야유 장면을 흔하게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조롱을 정치적 편향성과 결합시키는 측면도 있다.

기존에 강한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용인됐던 조롱이 어떻게 사용돼야 하는지는 잊혀지고 정치적 반대편이면 약자를 가리지 않고 조롱의 칼을 휘두르는 행위만 남았다.

조롱문화는 돈, 권력, 어른 등 사회 기득권에 대한 조크나 풍자가 허용되지 않는 문화에서 은폐된 분노 표현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조롱의 악순환을 멈추려면 상대방 비난을 멈추고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특히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들이 조롱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때이다.

찬성과 반대로 편을 갈라 이기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토론문화, 타인의 의견을 듣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보다 자기주장이 센 사람을 더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과연 옳은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의회정치와 언론 등이 제 기능을 회복해 국민들의 의견이 현실정치에 공정히 반영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조롱문화를 바꿔가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곧, 극단적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현상을 사회가 공정한 룰에 의해 돌아간다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 때 패륜적 조롱문화가 사라질 수 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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