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인 박금남
‘눈물’을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눈알 바깥 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데,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중 가장 정직한 것이 땀과 눈물이다. 고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땀이 나고, 참을 수 없는 격정이 마음을 흔들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러나 땀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온도의 변화만으로도 흘릴 수 있지만 눈물은 억지로 흘릴 수 없다.

올해는 눈물을 흘릴 일이 너무 많았다. 눈물은 슬픔과 분노, 기쁨과 즐거움, 아픔 등의 감정이 다소 격해질 때 나온다. 그런 눈물이 진짜와 가짜도 있고 때론 힐링도 된다.

요즘 연일 쏟아지는 슬픈 소식을 보면 올라오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 특히 세월호 참사에 따른 학생들의 동영상은 스토리 때문에도 울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지 못하면 마음이 강퍅해지고 마음의 병이 생긴다고 한다.

사람들은 억울하여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또 참회를 할 때 눈물을 흘리곤 한다. 눈물은 상황에 따라 최고의 설득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참회 정도를 보며 악어의 눈물을 인용한다. ‘악어의 눈물’은 고대 로마의 사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박물지>에 “이집트 나일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잡아먹은 후 그를 애도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을 잡아먹은 악어가 먹잇감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위선의 상징이 되면서 쓰는 말이다.

세상에 갓 태어난 갓난애는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고 눈물 샘이 발달하면서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은 일생 동안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릴까. 울지 않아도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물 샘에서 조금씩 눈물이 분비된다. 눈을 깜박이는 횟수는 평균 6초에 1번. 깨어 있는 시간을 하루 16시간으로 보면 1년에 약 350만 번, 수명을 70년 잡으면 일생 동안 2억5천 번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눈물을 눈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든 감정이입 상태에서 흐르는 눈물을 통상적으로 눈물로 칭한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베흐트가 2006년 30개국 대학생 2323명을 대상으로 남녀는 한달에 몇 번 ‘눈물’을 흘리는지 조사를 실시해 남자는 한 달에 평균 1회, 여자는 2.7회 ‘운다’는 결과가 있다.

이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눈물에는 더 인색하다. 눈물은 그 동안 강력함과 감정의 통제를 요구했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전유물이자 나약함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부드러움과 감정표현이 자유로운 감성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나약함’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대신 ‘공감’의 의미로 대체돼 버렸다.

눈물에는 모두 이유가 있을 만큼 감성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거짓으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정치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에는 아주 드문 것도 아니다. 현대 정치에서는 정책이나 신념보다는 ‘감성 정치’에 호소해 주목을 끌려는 정치인이 늘고 있다. 언어를 통해서는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는데 부족함을 느끼고 ‘눈물’이나 ‘큰절’ 등의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유권자의 마음에 파고들고자 함이다. 때문에 눈물이 정치와 연결될 때는 어떤 화학적인, 또 사회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눈물은 일반적으로 가장 순수한 슬픔과 비탄을 표현하는 진실을 함의하고 있어 백 마디의 말보다 호소력이 강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똑똑해지면서 사전에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실행하는 비언어적 행위로 눈물을 교묘하게 조장하기도 한다. 의사소통에서 표정, 자세, 제스처 등과 같은 신체언어의 활용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언어보다 더 진심을 담고 있고, 우는 행위는 다분히 감성을 자극하고 화자의 견해에 동조하게 만들어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즉 비언어적 행위는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행위로 더 신뢰적이다보니 눈물을 보여주지 않으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같고, 눈물을 보이며 말해야 진심이 전달되는 정치사회가 됐지 않나 싶다.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로 인해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은 지금까지도 비통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5월 19일, 대국민담화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눈물은 당시 6월 지방선거와 맞물려 논란이 컸다. 평소 ‘얼음공주’로 불리는 박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흘린 눈물을 두고 야당은 여당을 지원하는 선거국면 전환용 관권선거 눈물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지 않은 것을 유심히 본 사람들은 ‘악어의 눈물’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박근혜의 눈물’은 진심이든 아니든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 새누리당은 지방선거에서 ‘박근혜의 눈물을 닦아주자’며 ‘박근혜 마케팅’으로 ‘세월호 심판론’을 돌파했다.

한비(韓非)는 형벌을 집행한 ‘임금’이 눈물을 흘렸다면 ‘어질다’는 얘기는 될 지 모르나 ‘정치를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눈물이 흔했던 네로는 오히려 폭군이 됐다.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치인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

영혼을 상징한다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한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나 진정성을 보여 줘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안겨 준다. 탈무드에도 ‘천국의 문은 기도에는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는 열려 있다’고 적혀 있다. 그가 말하는 뜻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안든 타인의 눈물을 보면 누구나 일단 숙연해진다. 단순히 약해 보여서만이 아니라 눈물이 우리 감정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물만큼 빨리 마르는 것도 없다. 또한 눈물만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오래 기억되는 것도 드물다. 그것은 남녀의 연애에서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그렇다.

진짜 진실이 통하는 공감이 필요한 시대다. 감정사회에서 표출되고 통용되는 감정이 솔직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눈물로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사회가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더 이상 자신들의 눈물을 국민이 닦아 주길 원해서는 안 된다. 당장에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상처를 완치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돼 살기 힘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이번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들처럼 소득 양극화와 경기침체로 팍팍한 삶에 시달리는 다수 서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희생하는 일꾼이 되는 게 책무다. 이는 대통령 눈물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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