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거점 지역이었던 반룡의 안쪽 마을
현경면 외반 4리 내반룡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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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거점 지역이었던 반룡의 안쪽 마을
현경면 외반 4리 내반룡 마을
  • 백창석 무안문화원장
  • 승인 2014.05.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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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석의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외반리는 현경면 소재지로 24번 국도와 809번, 811번의 지방도로가 마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현경면의 공공시설물과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어 현경면민의 중심 생활권이 되는 곳이다. 외반, 화촌, 조암, 내반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래 목포부 망운면의 지역으로써 반룡동의 바깥쪽이 되므로 ‘바끝 반룡’ 또는 ‘외반’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반리와 다경면의 신흥리 고실리 조암동 기동 화촌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외반리의 지세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盤龍이란 한자도 용이 서려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경초등학교 마당바위가 있는 곳이 용의 머리라면 매부리는 용의 꼬리에 해당한다. 주민들은 지세로 보면 용이 머리를 들고 望雲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으로 昇天을 향한 용틀임의 지세라는 것이다. 특히 구름을 뚫고 비상하는 국제 비행장이 망운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주민들의 믿음은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

▲ 내반룡마을 전경

▲반룡의 안쪽에 해당하는 마을
조선시대 후기 이 마을을 포함한 외반리 지역은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목장지대였다. 주민들은 매부리에서 현경초등학교를 지나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토성은 반룡동 토성이라 불렀는데 망운목장의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축조한 토성으로 당시 다경면과 현화면의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성들, 성안, 성 너머, 목장 성터, 성등 등의 지명을 말하고 있다.

내반룡 마을은 외반4리에 속하는 마을로 지세로 보면 반룡동의 안쪽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또한 현경면 소재지를 외반룡 마을과 함께 양분하고 있다. 이 마을에 해당하는 중요시설로는 현경파출소 현경중학교 현경고등학교 노인회 현경면분회 현경우체국과 현경농협 일부 등을 포함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광산 김씨 金(자-앙지, 호-야은. 1609-1692)이다. 공은 광산김씨 무안군의 첫 입향조인 金憲文(자-공칙, 호-지당. 1555-1592)의 손자이다. 공은 1600년대 중반에 운남면 성내리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정착했다. 공은 기우가 헌칠하였고 덕을 겸비하여 주민들은 덕이 있는 군자라 칭하였다. 김헌문공은 운남면 성내리 계당산 아래에서 거주하다 임진왜란을 맞아 김천일 장군의 막하에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외반룡 마을이 1700년대 이후에 형성된 마을이니 외반리의 실질적인 입향조는 광산김씨라 할 수 있다.
자료를 통해 이 마을의 역사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반룡동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망운면에 속한 외반리 내반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 현경면 외반리 내반 마을로 나오며 1980년의 자료부터는 현재와 같이 현경면 외반4리 내반 마을로 나온다.

이 마을은 물이 필요한 마을이다. 풍수상으로 용이 서린 고을이라 용이 놀 수 있는 물이 필요한 것이다. 해서 마을 가운데 당산거리라 불리는 앞선거리의 당산나무에는 주민들이 마련한 물통이 놓여있다. 연못을 파려고 했으나 부지가 없어 우선 물통을 마련한 것이다. 그 물통에는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에는 시원한 물을 넣어두어 목이 마른 사람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산제를 금년부터 지내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 매년 당산제를 지내왔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 마을에 우환이 자주 발생하고 주민들의 일체감 조성이 필요해지자 청년회를 중심으로 다시 지내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 순박하여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으며 큰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에게 텃새를 부리지 않아 누구나 쉽게 원주민들과 친해질 수 있고 서로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마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격납고가 2개 있다. 마을에서 송정리로 가는 현해로에서 사랑채 식당 앞 길 건너에 1기가 있었고 그 옆에 또 1기가 있었다. 그런데 집을 짓거나 외곽도로가 나면서 모두 묻혀지거나 파괴되었다. 농협 옆에 커다란 고인돌 1기가 있었으나 이 고인돌도 현재는 없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다. 망운과 해제에서 나오는 길목이고 무안읍과 영광의 불갑산으로 갈 수 있는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해서 현재 파출소 자리에는 그 당시에도 지서였는데 지서 앞길은 함부로 나다닐 수 없도록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부교를 설치하였다. 주민들은 저녁이 되면 그 부교를 걷어 올리고 낮이면 통행이 가능하게끔 다시 부교를 내렸다. 왜냐하면 저녁이면 감방산 주변에 있던 빨치산들이 내려와서 주민들을 해쳤기 때문이다. 또한 지서 주변에는 대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여 방어벽을 쌓기도 했다.

지서에서는 인민재판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에 그 재판을 목격했던 분의 말씀을 들으면 처형을 위한 일방적인 재판이었다고 한다. 첫 번째의 희생자인 해운리의 고복덕이란 분이 대상자가 되어 처벌 받은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재판에서 판결 받은 자는 현재 현경중학교 건너 김씨묏간이라고 부르는 산에서 처형당했다. 그때 강제로 동원되어 구경하던 주민 중 한사람이 처형하는 유탄에 맞아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라고 한다.

또한 망운면과 현경면의 경계인 현경고등학교 옆 잔등은 죽창부대와 칼빈총 부대의 대결장이기도 했다. 주민들이 망운잔등이라 부르는 이 언덕은 한국전쟁 당시 좌익과 우익의 대결장이었다.
노인회 현경면 분회가 있는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신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암동에 있었던 초등학교가 비행기 폭격으로 없어지자 임시 교실로 쓰이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세 개의 샘이 있었다. 당산거리의 샘과 옹달이샘 그리고 매부리에 있는 황샘이다. 자료에 의하면 매부리에 있는 황샘은 매년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황새 한 쌍이 날아와 주변을 맴돌고 갔다고 한다. 또한 이 샘은 비가 온 후에는 해제쪽으로 무지개가 어렸다고 한다. 하지만 세 개의 샘 모두 현재는 없다.

알림-마을탐방 5월과 6월 쉽니다.
본보 마을탐방 게재가 6·4지방선거와 더불어 5월과 6월 우리 지역 농번기로 인해 당분간 쉽니다.
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은 “바쁜 농사철이 되면서 마을 섭외가 어렵고, 설사 섭외가 되더라도 마을주민 한두 사람만 참여하여 내용이 부실해지기 쉽다.”고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했습니다.
마을탐방은 7월부터 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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