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청계면 복길2리 텁석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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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청계면 복길2리 텁석골 마을
  • 백창석 무안문화원장
  • 승인 2014.04.28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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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석의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 마을표지석, (안쪽)텁석골조인식자료 명첩

卜吉里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한다. 동으로는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해안과 인접해 있으며 복길선착장이 있어 인근의 교통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청계만의 중심 지역으로 낙지와 숭어 등 각종 수산물이 잡히는 지역이다. 본래는 일서면 지역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복길에는 무안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와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86인을 추모하는 위령탑이 있으며 토끼섬이 있다. 텁석골에는 두 곳의 옹기가마터가 있다.

卜吉을 뱃길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로 전해 온다. 하나는 ‘마을의 형국이 서해안을 향해 직선으로 쭉 뻗은 데다가 마을 옆에 토끼섬[兎島]이 있어 마치 한자 ‘卜’ 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卜吉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다를 상대로 생업을 이어가다 보니 점술이 많게 되고 점술을 하게 되면 마을이 흥해진다 해서 복길이라 했다 한다. 하지만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福吉里로 나온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가서야 현재의 卜吉洞으로 나온다.

▲정겨운 느낌을 주는 지명
텁석골은 복길2리에 속하는 마을로 호구총수를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1980년의 자료에 가서야 복길2리 텁석골로 나온다. 실지 마을의 역사를 보면 인구증가로 1970년대에 복길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지금은 농업과 축산업의 경영으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분리될 당시만 해도 대단히 어려운 환경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크게 세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 연방죽 질막금 텁석골(중앙교) 함박금 조선뻘개 등의 마을이 있다. 마을 앞으로는 복길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으며 간척지 너머에는 주민들이 방망치 코뺑이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텁석골이란 지명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에 깔다구가 많아서 유래된 이름으로 해남의 깔다구를 가져오다가 이 마을에 와서 텁벅 퍼 버렸다 해서 텁석골이라 했다. 또 하나는 한 나그네가 청계에서 복길로 가다가 이 마을을 지나갈 때 텁석 주저 앉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유야 어떻든 지명에서 풍기는 소박함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한양조씨 조경원(자-여진. 1865-?)이다. 공은 청계면 상마리에서 살다가 1900년대 초에 이 마을로 건너왔는데 선대는 진사시에 합격한 선비 집안이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는 복합 마을로 큰 마을인 복길 마을은 한국전쟁 때 좌우익의 갈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옆에 있었던 이 마을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1986년에 막아진 복길 둑은 삼향면 왕산리 금동 마을과 청계면 복길리 복길 마을을 잇는 제방으로 이 마을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해준 고마운 둑이다.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고기도 잡을 수 없고 농지가 없어 농사도 지을 수 없었던 이 마을은 둑으로 형성된 간척지로 인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약효가 좋은 시여샘이 있었다.
마을에는 그 약효가 널리 알려진 샘이 있었는데 복길 제방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바닷물 가운데서 물이 쿨쿨 솟았던 샘이다. 물이 빠지면 마치 폭포처럼 물길이 솟아 올라 인근 주민들이 그 물을 맞으러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그 물이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목포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자 마을 주민들은 번거로움에 싫증을 냈다. 그러다 한 주민이 개를 죽여 물구덩이에 집어넣자 효험이 없어지면서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 샘은 시여샘(주민들은 시어지 물둠벙이라 한다. 복길마을에서는 통개샘으로 알려졌다)으로 무안의 못샘-화설당 샘-농공단지 샘-상마정 샘-그리고 이곳으로 연결되는 水脈을 갖고 있다. 이 샘은 얼마나 수량이 풍부한 지 5인치 양수기로 하루 종일 물을 품어 올려도 마르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시여샘의 수맥을 찾으려고 주변을 파헤쳤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늘 물이 넘쳐 그 물길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높다.

마을 앞 간척지 너머에는 야구방망이 모습을 하고 있는 둔덕이 펼쳐져 있는데 이 맥은 승달산에서 보살봉으로 이어지는 서당뫼의 맥을 잇고 있다. 주민들이 방망치 코뺑이라고 부르는데 이웃 마을인 남성리에서는 방망치라 부른다. 주민들은 이곳에 ‘百子千孫之地’의 터가 있다고 하나 찾지 못했으며 간척이 된 후로는 풍수로 본 길지의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이 방망치 위쪽에는 물이 들면 솥뚜껑이고 빠지면 자라목 같다는 소드랑 섬이 있다. 현재는 토석채취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옆에는 노숙인 재활시설인 동명원이 자리하고 있다. 동명원은 1967년 목포에서 부랑아 복지시설로 개원하여 1984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회관 옆에는 1963년에 개교한 복길국민학교가 있으나 인구 감소로 1994년에 폐교되어 방치되어 있다.

바닷바람이 셌던 진등재 안에 장바닥골이 있었다. 진등재는 마을에서 복길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또한 질막금이란 곳에는 옹기를 구웠던 가마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과 복길 마을 주변에는 금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사금이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삭기미[砂金]’라는 곳이 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있다. 금의 큰 덩어리가 묻혀 있다고 해서 ‘함박금(함박골 함박등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금은보화가 숨어있다고 해서 ‘은금이’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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