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석의 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月岩里는 달바위 전설을 안고 있는 일로읍 소재지로써 일제 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어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본래 무안군 일로면의 지역이었으며 1910년에는 잠시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현리, 덕암리, 부광동, 회인동 일부와 이로면의 남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암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장터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
시장촌은 신흥마을이라고도 불리며 1971년에 월암리가 1,2구로 나뉘어 지면서 형성된 마을로 대부분의 주민이 시장 상인들이다. 원래 일로장은 지장리 송태(삼향장, 세명장이라고도 함)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강남산 마을에 장터가 이전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러다 장소가 좁아 1956년(1960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일로 장날(1일, 6일)이 되면 근방의 걸인패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각설이 타령도 하고 시끌벅적하게 흥청거렸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 청호리 주룡나루를 통해 장을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무안의 청계 몽탄 삼향과 목포 등 4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로 장날은 그 자체가 큰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어찌나 사람들이 많았던지 마치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일로장이 컸었던 것은 영산강이라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난장판이 되었다. 시장 곳곳이 움푹 패이고 진흙 뻘땅이 만들어져 장화가 없이는 생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장이 형성된 곳은 운송로가 좋고 물산이 풍부한 영산강 주변의 나주와 무안이라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나 흔적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영산강 주변인 일로에서 처음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하지만 주민들과 대화에서도 삼향장 이전의 장터는 모른다는 것이다.

원래 시장촌 자리는 농지였으며 군유지였다. 군에서 시장을 형성하면서 이곳에 국민주택을 지어 보급하였다. 그러다 1970년대 광주세무서 직원이었던 이석호에게 땅을 빼앗겨 군에서 재판을 통해 다시 찾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현재는 개인들이 군으로부터 불하를 받아 군 소유의 땅이 많이 줄어들었다.

▲국밥과 품바가 있어
이 시장에는 두 개의 명물이 있다. 하나는 일로 국밥이다. 국물 맛이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국밥집 주인인 장영자씨는 시어머니 때부터 해온 장사로 처음엔 영산강과 남창촌에서 잡아 올린 가물치회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영산강과 남창천이 오염되고 가물치의 명성이 사라지자 국밥집을 했는데 시어머니의 음식솜씨가 뛰어나 맛있기로 널리 알려졌다. 시장이 썰렁해진 지금도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맛을 찾아온다.

두 번째는 품바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로 장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난 손님이 각설이패들이다. 장타령으로 불려지는 각설이 타령은 세명장에서부터 있어왔으며 품바는 이 각설이패들의 가락과 사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각설이의 주인공 자근이는 의산리에서 살았으며 키가 작았지만 의리가 있었다. 남을 속이지도 않았으며 도둑질은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한테는 거지였지만 인기가 있었다. 또한 그는 마케팅의 전략가였다.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얻어먹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거기다 장타령을 잘 불러 인기도 있었다. 후일 이 장타령은 사위인 김광진에게 전수되었고 1980년대에 김시라를 만나면서 품바라는 예술로 발전한 것이다.

자근이는 땅꾼이기도 하였다. 장날이면 손님을 끌기 위해서 직접 잡은 뱀들을 가지고 뱀장사를 하기도 했다. 해서 인근의 시장 군수 서장 등 권력가들이 뱀탕을 먹기 위해서 자근이를 찾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핵 환자들에게는 구세주이기도 하였다.

현재 시장촌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한때 우시장에서 소는 150마리, 돼지가 50마리 정도 거래가 될 정도로 흥청거려 주민들이 살기 좋았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의 발달과 인근의 대형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2년 전 일로시장의 큰 축이었던 우시장이 구 일로역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시장의 위상은 대폭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악에 건설되고 있는 대형마트는 상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전통시장 현대화의 일환으로 건설했던 시장촌 안의 각종 구조물이 오히려 시장의 발전에 저해가 되어 난처한 지경이 되었다. 실지로 8시만 되면 일로 거리에는 불 켜진 가게가 거의 없다. 유령의 도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시장이 이전하면서 무안 축협이 소유하고 있었던 시장터 일부를 주민들에게 희사해 그곳에 마을회관을 지어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게 된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다.

주민들은 시장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님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먹거리를 특화시켜 물건을 파는 것보다 보여주고 먹게 해주는 것이 일로시장을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 해서 현대화된 건물보다 간소한 비가림 시설로 노점상들이 들어서고 엿장수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 장수들도 자리를 잡아 흥청거릴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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