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석의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義山里는 일로읍 소재지에서 영산강 쪽으로 펼쳐진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仁義山 (152m) 주변에 모여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영화농장으로 인하여 넓은 농지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노촌면의 지역이었으나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에는 덕치동 산후정 내동 구월동 죽산동 무용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 일로면에 속하게 되었다.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의산리라 이름 하였던 이곳은 품바타령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현재는 인의산 산두 돈도리 무룡동 내동 소지 등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인의산 안골 마을
의산5리는 인의산을 배경으로 덕치와 내동 뒷당재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대부분 내동에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원래는 인의산 마을과 한 행정구역이었으나 80년대 들어서 분리 되었다.

내동 마을은 인의산 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안들 또는 안골 마을이라 불렸다. 일제 강점기 때 형성된 마을로 여겨지며 인의산을 주산으로 하고 마을 앞에 나빗등이 있으며 나빗등 너머에는 노적봉이 있다. 나빗등은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나비가 날아서 영산강에 있는 멍수바위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강물이 막혀 가지 못하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 나빗등이 마을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나빗등 끝머리에는 나빗머리(나붓머리)라는 둔덕이 있다. 나비의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곳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소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나무가 훼손되거나 없어지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래 이 마을엔 한씨가 살았다고 했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또 다른 마을인 덕치는 인의산의 맥을 이은 노적봉을 주산으로 하고 소포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원래 18가구가 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으나 현재는 2가구만 살고 있다. 조선시대 호구총수에도 나오는 이 마을은 큰 불이 나서 주민들이 대부분 안들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해서 지금도 이 마을 주변을 파보면 숯이나 재 그리고 기와 조각 같은 것이 많이 나온다.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명당이 있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던 곳이다. 인의산의 혈을 받은 매화낙지의 혈처를 이 마을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해서 이곳에 묘를 쓰려는 사람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실지로 이 마을에서 두 사람의 장성이 나오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가옥들이 폐가가 되어 관리가 되고 있지 않지만 관심이 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의산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물이 없는데 이 마을에는 샘이 있었다. 새끼샘기라고 부르는 독틈 새에서 나오는 독샘이다.

▲ 소포들이 있어
마을유래지는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이 덕으로서 주민을 다스리고 덕으로 이웃마을까지 교화한다 하여 덕치라 하였다. 또한 입향 사실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선 선조 연간에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왔으며 서로가 좋은 인심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에 김해김씨가 살고 있어 족보를 통해 입향조를 확인해 보려고 했으나 할 수 없었다.

마을 앞에 있는 소포들은 소포선생이 덕치 마을에서 구정 마을까지 막은 둑이다. 소포는 주룡 마을의 입향조 나덕명(자-극지, 호-소포. 1551-1610년)으로 공이 1589년 정여립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워 사면을 받자 나주로 귀향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청호리 주룡 마을에 부친을 모시고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 농지가 부족한 일로 주민들의 상황을 보고 사재를 들여 구정리와 의산리 사이를 막아 들을 형성한 것이다. 아쉽게도 주민들의 배고픔을 구원했던 소포공의 활동을 적은 공적비나 소포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석 같은 것들이 없어 안타까웠다.

이 마을 박무삼 이장은 ‘인의산은 한자 仁義의 모양새를 닮았다’고 한다. 실지로 인의산 정상에서 살펴보면 인의산 마을을 중심으로 양맥이 펼쳐지고 있는데 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인의산을 둘러싸고 있는 6개 마을의 모습이 한자 義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견지명이 있다. 마을 옆에 영산강 쪽으로 딴봉이라고 부르는 외딴 봉우리가 있는데 원래는 인의산의 한 줄기였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인의산이라 부르지 않고 딴봉이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연유를 몰랐다. 그러다 1990년대에 무안군에서 인의산과 이 봉우리의 맥을 끊어 폐수처리장을 세우면서 인의산과는 다른 딴 봉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고 한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 강변이 물반 고기반의 황금어장이었다. 숭어를 비롯한 대과이 장어 등이 지천으로 잡혔기 때문이다. 영산강이 막힐 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해서 간척지를 분할 할 때 당국에서는 영산강에서 고기를 잡았던 가구에겐 두 배로 농지를 불하해주기도 하였다.

마을 앞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비롯한 빨치산들이 영암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마을 앞에 소댕이 나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당시에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사람이 다치는 등의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 바라보이는 멍수바우에는 모자간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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