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석의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마을 탐방을 다시 시작합니다.

2004년부터 실시해왔던 마을 탐방이 2012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문화원장이 되면서 바로 시작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이유들이 많이 있어 아쉬운 사항이 많지만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무안군에서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마을이 380여 개 마을이 있습니다. 앞으로 탐방해야 할 마을이 30여 개가 남아 있는데 금년 안에 탐방이 모두 끝나면 마을별 문화역사 지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는 어느 성씨가 들어와서 언제 마을을 형성하였는지, 마을별 고인돌이나 선돌 사우 재각 등 문화유적은 몇 개가 있는지 또 전설이나 사건은 없었는지 어떤 인물을 배출하였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료가 정리되면 행복마을 전원마을 예술마을 정보화마을 등 각종 마을별 사업을 전개할 때 기본적인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알게 해주어 문화적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역사문화교육의 학습장이 되고 향우들에게는 애향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습니다. 주민들의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무안문화원장 백 창 석)

 

良壯里는 몽탄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5㎞ 가량 떨어진 당호 저수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일로읍 광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파군교를 마주 보고 있다. 이 지역은 본래 무안군 박곡면에 속했던 곳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월산리 청계리 양지촌 도림산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양지촌과 비장동의 이름자를 따서 양장리라 했으며 도림산 월산 양지촌 등 3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도림산과 양지촌 마을은 같은 입향조의 나주丁씨 마을이며 월산 마을은 또 다른 나주鄭씨가 살고 있다. 도림산 마을에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나주丁씨 재각인 보유재가 있다. 월산마을에는 풍천임씨 재각인 삼천재가 있으며 독배기에 고인돌 4기가 있다.

▲어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양장3리는 양지촌 성자동 마을로 이루어 졌으며 행정구역상 도림촌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87년 무렵 분리되어 양장3리가 되었다. 원래 양장리는 최가들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씨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전주 최씨들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다. 그러다 1600년대 이후 나주 정씨들이 청계면 송현리에서 이 마을로 들어서면서 정씨 집성촌이 되었다.

양지촌의 이름은 한자 표기상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먼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박곡면 陽地村으로 나온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인 1912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良之村,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양장리 良之村으로 나오다 1981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양장리 良芝村으로 나온다. 현재는 陽芝村으로 쓰고 있으나 탐방에서 만난 주민들은 한결같이 良之村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란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터가 양달이어서 울이 짜여있는 것처럼 따뜻하여 예부터 선비들이 기거하기에 알맞은 터이며 당시 鄕內의 선비들이 지초를 심어 遊樂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陽芝村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몽은(자-경양, 호-모암. 1624-1684)이다. 공은 원래 청계면 송현리에서 살던 (정암)의 큰 아들이다. 정암 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부인인 전주이씨는 둘째 아들인 몽열을 송현리에 두고 큰 아들인 몽은과 몽득 몽신을 데리고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입향조가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은 도림산 마을이 아니라 양지촌 마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 도림산 마을이나 월산마을은 나오지 않고 양지촌 마을만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보면 영산강 물이 얕아지면서 점차 밑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 때는 위세가 대단했었다.
마을의 형세를 보면 승달산의 맥을 이어 국사봉 장군봉을 거쳐 매봉 아래에서 터를 잡았다. 우측에는 만석군 터가 있으며 좌측으로는 비장골이 있다. 비장골은 현재 양장1리에 해당되지만 그곳에는 원래 5가구가 넘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5가구가 넘게 살면 반드시 넘는 가구는 폐가를 당한다는 전설 때문이다. 현재는 3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에 두 개의 샘이 있다. 골샘과 중샘인데 골샘은 철분이 많아 주민들 말대로라면 물의 무게가 무안에서 가장 많이 나갔던 물이라고 한다. 중샘은 중들이 오가면서 사용했던 물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두 샘 모두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양지촌과 성자동 사이에는 쇠묏등이라는 둔덕이 있으며 그곳에는 정씨들의 선조 무덤이 있다. 성자동은 공부하기 좋은 곳이어서 그곳에서 공부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진사급제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수맥파 차단판(대한민국 특허 20-04225815호)를 국내 최초로 발명하여 2011년에 대한민국 기술혁신 대상을 수상한 정철표씨가 살고 있다. 이분은 17대 몽탄면장을 역임했으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민 중에 정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공부를 많이 하고 만주에서 활동하였는데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활약하였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주민들 중에는 그 사람이 자랑하면서 보여주었던 사진 중에 김일성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 사람이 내려오면서 돈을 많이 가져와 주민들 말대로라면 파군다리에서 마을까지 돈을 깔아도 남을 만큼의 돈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박을 해서 탕진했다고 하니 아쉬울 뿐이다. 현재 그 사람은 고인이 되었으며 후손도 살고 있지 않다.

한국전쟁 때 주민들은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으나 주민 중 몇 사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주민들의 양반 행세가 대단하여 타지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날 때에는 복장을 단정히 해야 했고 거동은 물론 말소리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때 지형을 따라 마을 옆으로 철도 건설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를 할 수 없었다. 또한 비장동 옆에 있는 동아실에 초등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또한 짓지 못하고 파군다리 쪽으로 갔다. 지금은 폐교된 몽탄남초등학교가 그것이다.

마을 옆 도림재에 문중 묘 단지를 조성하다 조선초기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발견하여 한국방송공사의 진품명품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자기 파편과 고대 생활 용기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월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뭇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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