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석의 마을 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柳橋里는 삼향면소재지에서 3㎞ 가량 떨어져 있다. 초의선사 생가 터 입구의 남양저수지에서 좌회전하여 전남예술고등학교를 지나 1㎞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동으로는 관동저수지, 서로는 중등포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나주군 삼향면 지역으로 버드나무 다리가 있으므로 유다리 또는 유교동이라 하였다. 1895년 나주목에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산동, 석정리, 성재동, 운악동, 청룡동, 석교리, 운흥동과 원동, 중등포 응석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유교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2007년에 유교2리에서 분리된 관동 마을과 함께 현재는 석교, 유교, 원동, 청룡, 중등포, 군산동, 관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유교 마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인 나상열 가옥과 침계정이 있으며 군산동에 애증원과 나주임씨 제각인 영유재가 있다. 또한 원동에는 나주나씨 제각인 경앙정과 구산재가 있다.

 

▲ 마을 전경

▲필봉의 맥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마을

청룡은 유교4리에 속한 마을로 국사봉의 맥을 이은 필봉의 한 맥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마을이다. 마을 이름에 ‘용’이란 단어가 들어간 지명은 우리 지역에 많이 있다. 복룡 청룡 용산 용포 회룡 상룡 등등이다. 이는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즉 산의 맥이 바다나 강을 향해 뻗어 있으면 풍수상으로 용으로 보는 것이다.

이 마을도 120년 전까지 마을 앞에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필봉의 한 맥이 바다를 향해 뻗어 내리고 있어 생긴 이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비자나무동네라 불릴 만큼 비자나무가 많았는데 주민들이 베어버려 마을이 훤하게 비친다 하여 청룡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룡은 50여년 전에 유교에서 분리된 마을로 노잿등 쟁피(장피) 사거리 청룡으로 이루어졌다. 노잿등은 중등포와 경계에 있는 밭으로서 주변의 평지보다 불록하게 솟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옆에 노재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쟁피는 마을 앞 시설단지 뒤에 있는 지역으로 장피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은 이곳이 ‘밥이 있는 자리’라고 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풍요로운 자리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가구 수가 늘지 않고 항상 세 가구가 살고 있는 지역인데 그곳에 살고 있는 어떤 가구도 경제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설엔 유교 마을의 나씨 천석꾼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나주 나씨 나상균(1884-1968)이다. 공은 임성리 신기 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했다.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함풍이씨 이북서로 120여년 전 맥포리 맥포에서 분가하여 주변 환경이 좋고 농사짓기에 좋다고 생각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어서 마을에 살고 있는 함풍이씨 후손의 족보를 보고 이 차이를 확인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봤을 때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 자료에는 무안군 삼향면 청룡동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유교리 청룡동으로 나오며 1988년의 자료에는 삼향읍 유교리 청룡으로 나온다.

 

▲지금도 유교 마을과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

유교리에는 비자나무가 많이 있었다. 석교 마을에도 있었지만 이 마을은 비자나무마을이라 할 만큼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자나무를 본 주민은 없었으나 유교마을과의 경계선도 비자나무거리라고 불리는 곳을 경계의 기점으로 삼았다. 현재도 비자나무를 볼 수는 없다.

▲ 마을 표지석
마을 앞은 거대한 비가림 시설 단지다. 주민들의 대부분 소득이 이곳에서 발생한다고 할 정도로 마을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시설이 처음 시작된 것은 68, 69년 대한해 이후 1970년부터이다. 당시 농업기술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설 하우스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도마토 뿐이었으나 작목반을 조직하면서 점차 품목이 다양화 되어 현재는 꽃과 파프리카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에 1920년 삼향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삼향초등학교가 있다. 자세히 보면 이 마을이 삼향의 중심지가 아닌데도 삼향중앙초등학교가 이곳에 세워진 것이 의아해진다. 면사무소나 파출소 등 주요 시설 등은 이곳에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그 이유가 일제강점기 때 천석꾼인 유교 마을의 나종만씨가 현재의 학교 부지를 희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교 뒤에 신사당 터란 지명이 있다. 이곳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신사 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다. 옆 마을인 중등포나 유교 마을 그리고 관동마을에 좌익성향의 인사가 있어 그로 인한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이 마을엔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 입은 마을들은 대부분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이 마을은 매년 2월 1일에 유교마을 주민들과 같이 침계정 정자 주변의 당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祭日이 가까워 오면 며칠 전부터 동각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당산나무에는 금줄을 치며 제관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음식은 여자들이 준비하되 제는 남자들만 모신다. 제는 밤 12시에 모시는데 한 해 동안 마을 주민의 건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마을 주민들은 농한기가 없을 정도로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마을의 역사는 짧지만 협력과 협동을 통해 새로운 마을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싼등(앞들), 부람실(바람실), 샘골(물이 많이 난다고 해서), 웃깡굴, 성자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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