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바위가 있는 길 옆의 마을
청계면 도대리 도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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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바위가 있는 길 옆의 마을
청계면 도대리 도대 마을
  • 백창석
  • 승인 2012.10.1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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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석의 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도대리는 조선시대 봉홧불을 올렸던 도대봉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 도대리 오른쪽에는 창포만 간척으로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앞에는 도대봉 자락에 천주교 공원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도대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도대라 했는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 청계면 도대리가 되었다.
마을에 청계서교가 있었으나 2007년에 폐교되었으며 마을 뒤에 있었던 고인돌 5기가 마을회관 앞에 있다. 또한 마을 뒤 당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도대 마을 한 마을만 있다.

 

▲▲ 도대마을 전경
▲길 옆에 터를 잡은 도대봉 아래의 마을

▲길 옆에 터를 잡은 도대봉 아래의 마을 道垈는 도대리에 속한 마을로 길 옆에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마을 앞에 우뚝 서 있는 도대봉 아래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도대봉은 고림봉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봉우리이다.

마을유래지는 지명의 유래를‘도대 마을은 도대봉 뒤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전에는 절이 있어 절골로 불렸다. 이후 도대 봉수가 있어 道垈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마을 주변에 해당화가 많이 있어 해당촌으로 불렸다. 이후 마을 중앙으로 길이 가로 질러 있기 때문에 刀垈라 하였다가 현재의 이름인 道垈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刀垈라 했던 것은 마을의 지형이 칼의 형국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승리봉 투구봉 등의 봉우리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전쟁에서 승리를 한 장수가 투구를 벗고 말을 쉬게 한 후 칼을 놓고 다른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刀垈라 하지 않았을까 여긴다고도 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도대리로 기록되었다. 이후 1912년에도 이서면 도대동으로 나오다 1917년에는 청계면 도대리 도대동으로 나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대청몰 아랫몰 웃동네 등 3村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서느리 정마동 여당뫼 등이 있다. 이 마을은 깃대봉 옥녀봉 차일봉 투구봉 승리봉 장구봉 등 여러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형이다. 또한 마을 아래는 창포만 간척으로 형성된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청주한씨 한처양(숙종대, 자-재양)이다. 무안세적지에 따르면 공은‘나주 오양리에서 세거하다 연이은 흉작으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를 확인할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어서 청송 심씨 심득상(자-영원, 호-남은. 정조대)이 들어왔다. 공은 함평 신광면 복치에서 세거하다가 생리로 인하여 이 마을로 들어왔다.

이 마을 뒤에는 삼동서 묘라는 조금은 특이한 묘가 있다. 삼동서는 청주한씨 며느리들을 말한다. 입향조인 한처양 공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망운면 조산동으로 갔고 둘째 아들은 이 마을에서 살았으며 셋째 아들은 망운면 덕림 마을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 아들 모두 30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러자 홀어미가 된 세 며느리는 재가도 하지 않고 자녀들을 키웠는데 죽어서 모두 이 마을로 들어와 함께 장지를 마련한 것이다.

창포만이 막히기 전 이 마을은 해당화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당화가 많이 피었다. 아랫갱변이라고 부르는 마을에 칼 모양의 널따란 백사장이 형성되었는데 이 주변의 1㎞가 넘는 지역에 해송과 더불어 해당화가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창포만 공사를 하면서 외지의 노동인부들이 들어와 이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해송과 해당화를 파헤쳐 버린 것이다.

▲미루바위와 장재바위가 있어

▲▲ 마루바위와 장재바위
아랫갱변은 주막이 여러 채가 있을 정도로 한때는 흥청거렸던 곳이다. 황금어장인 청계만에서 잡아 올린 각종 수산물이 이곳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또한 갱변에 점등이 있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있었다고 한다. 점등은 서호리의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한다.

도대봉은 높이가 180m에 지나지 않지만 해안가에 있어 사면이 탁 트인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의 군산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함평현의 옹산봉수까지 연결했던 도대봉수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봉수대도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 때가 되면 이 산은 만남과 놀이의 장소였다. 남자들은 봉화대 연대의 돌을 산 아래로 굴리고 부녀자들은 연대 주변을 돌며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또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범바위와 마당바위 등이 있다.

이 마을은 자연 마을로는 무안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주민이 300여명이 넘고 마을의 경제력도 주변 마을에 뒤지지 않는다. 대다수 주민들을 신도로 둔 큰 교회가 있고 보건진료소가 있으며 2007년에 폐교된 청계서초등학교도 있었다. 현재 폐교는 무안군에서 농산물가공지원센터로 이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6개의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그중 5개가 고인돌로 추정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4개는 마을 뒤 바윗등이라는 곳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이중 미루바위와 장재바위가 있다.

미루바위는 메루바위 또는 멸구바위라고도 하는데 들판에 있었던 바위로 여름철에 제사를 지냈던 바위다. 예전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멸구는 재앙이어서 멸구를 없애는 것이 한해 농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름철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이 바위에 재물을 올려놓고 멸구의 방재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던 것이다. 장재바위는 폭이 50㎝ 정도의 좁은 바위로 개천을 건널 수 있게 하는 다리 바위였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喪을 만나면 상여가 이 바위를 건너 장지로 간다고 했다.

주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다. 마을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는 도대길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본동네와 중촌이 나뉘어 지는데 주민들이 편하게 다닐 수 없어 늘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다. 한때는 군에서 마을을 우회하는 도로를 개설하려고 계획도 세웠는데 예산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재까지 미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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