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벼슬아치가 태어날 수 있는 지형의 마을
삼향읍 유교7리 관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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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벼슬아치가 태어날 수 있는 지형의 마을
삼향읍 유교7리 관동 마을
  • 백창석소장
  • 승인 2012.09.10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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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석의 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柳橋里는 삼향면소재지에서 3㎞ 가량 떨어져 있다. 초의선사 생가 터 입구의 남양저수지에서 좌회전하여 전남예술고등학교를 지나 1㎞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동으로는 관동저수지, 서로는 중등포 간척으로 생긴 농경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나주군 삼향면 지역으로 버드나무 다리가 있으므로 유다리 또는 유교동이라 하였다. 1895년 나주목에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산동, 석정리, 성재동, 운악동, 청룡동, 석교리, 운흥동과 원동, 중등포 응석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유교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2007년에 유교2리에서 분리된 관동 마을과 함께 현재는 석교, 청룡, 군산동, 유교, 중등포, 원동, 관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유교 마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인 나상열 가옥과 침계정이 있으며 군산동에 애증원과 나주임씨 제각인 영유재가 있다. 또한 원동에는 나주나씨 제각인 경앙정과 구산재가 있다.

 

   
▲ 삼향읍 관동마을 전경

 

▲후에 벼슬을 할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지형
관동은 유교7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원래 밀양 박씨의 터였다. 향교지에도 밀양박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박씨들은 한 가구도 살지 않고 있다. 이후 100여년 전에 군산동에 살던 나주임씨 임명묵이 분가하여 정착하면서 임씨 촌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임씨들의 족보를 볼 수 없어 자세한 내력은 확인할 수 없다.

마을유래지에는 ‘관동 마을 입향조는 밀양박씨 박성경(자-경열. 참봉)으로 원래 충청도 모계월에서 살았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충무공 휘하로 들어가 싸웠는데 명량싸움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자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 이름의 한자표기가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1987년에 발행된 행정구역일람에는 冠洞으로 나온다.

마을유래지나 마을 경로당 표지석에는 官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에게 어느 것이 맞냐고 물었더니 冠洞이 아니라 官洞으로 표기해야 옳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의 형세가 후에 벼슬을 할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지형이어서 벼슬 官을 써서 官洞이라 해야 맞는다는 것이다. 실지로 마을 주민들 중 상당수가 공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마을이름의 변화를 문헌을 통해서 보면 조선시대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일제강점기 자료에도 관동이란 지명은 없다. 공식적으로 마을이름이 등장한 것은 1987년 행정구역 일람이다. 이후 각종 자료에는 관동이라는 마을이름이 나온다. 이 마을은 2007년 12월에 유교2리인 유교 마을에서 독립하여 유교7리로 분리되었다. 해서 문화나 역사의 상당부분 유교마을과 겹친다.

이 마을은 국사봉의 맥을 이은 한(황)새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 들판은 싼등이라 부르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세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우렁바위라 했다. 마을의 지형이 황새가 우렁을 먹으려고 쳐다보고 있는 형국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농지가 정리되면서 그 바위들은 없어졌다. 사방사업이나 생활기구 등을 만드는데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의 신도가 한 사람도 없는 교회가 두 개 있어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지금도 싼등에 있는 농지를 경작하면서 조금만 깊게 파면 뻘땅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마을 옆 관동저수지에서는 꿀 껍질이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되었다.

마을 앞에 쟁피라 부르는 지역이 있다. 장피(獐皮)라고도 하는데 주민들은 ‘밥이 있는 자리’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가구 수가 늘지 않고 항상 세 가구가 살고 있는 지역인데 한 가구도 경제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설엔 유교마을의 나씨 천석꾼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말하기를 주저하는데 이 마을도 한국전쟁 때 주민들 간 갈등이 심했다. 해서 제삿날이 같은 집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주민들이 좌우익의 갈등으로 이 지역에서 활약한 공산당원들에게 부르조아로 몰려 동시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빈부의 차이가 심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옆 마을인 유교 마을에 인민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그러듯이 이 마을도 노인들만 살고 있다. 그런데 주민들도 적고 마을도 협소한 이곳에 두 개의 교회가 들어서 있다. 특이한 점은 마을 주민들 중 기독교 신자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마을 입구 숲쟁이라 부르는 곳에 나씨 제각이 있었다. 마루를 대리석으로 깔 정도로 멋과 호사를 부렸던 제각이었다.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문화재급에 속하는 귀한 재각이었는데 후손들의 관리 잘못으로 남의 손에 넘어 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그곳엔 교회가 들어서 있다.

산이 깊어 동물들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가 크다. 고구마 등을 비롯한 많은 작물들이 맷돼지 고라니 등 산짐승으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 해서 주민들은 저녁에는 개들을 농작물 옆에 묶어놓기도 한다.

마을 입구 유교마을엔 중요민속자료인 전통가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집인데 이 가옥의 주인인 나종만은 당시 천석꾼으로서 삼향, 일로 몽탄 일대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나씨 땅을 밟지 않고는 목포에 갈 수 없다’거나. ‘나씨 집에 소가 어떻게나 많던지 소의 코뚜레 만도 한 짐이 될 정도’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동학 배상옥 장군의 텃자리인 대양리와 가까운 이 마을에도 동학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등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희생자가 동학 때인지 한국전쟁 때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유교마을에서는 ‘작은 샛골’이나 ‘외앞뫼’란 곳에서도 많은 동학군들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영골 구능골 장광골 웅광골이 있다. 또한 마을에서 삼향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꾀꼬리재라 부르는 곳이 있다. 꾀꼬리 명당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숲이 우거져 날씨가 조금만 어두어지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고개였다. 왕산리 사람이나 유교리 사람들이 주로 다녔던 길인데 중간 중간에 주막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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