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향읍 왕산4리 마갈 마을

▲ 삼향읍 왕산4리 마갈 마을 전경


旺山里는 삼향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수산을 주산으로 광주 목포 간 1번 국도와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있으며 북으로는 수도생활과 봉사생활의 균형을 추구하고 있는 디아코니아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나주군 삼향면 지역으로 1895(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되고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갈리, 평산동, 마동, 금동과 원동, 곽단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왕산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평산, 왕산, 금동, 마갈, 마동, 동뫼, 덕산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86년에 완공된 복길간척지가 금동 마을과 청계복길 마을을 연결한다. 우도(소섬) 중도(가운뎃섬) 계도(닭섬) 갓섬 등 네 개의 섬이 있다. 왕산 마을에 초의선사 생가터가 있다.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지형

마갈은 왕산4리에 속한 마을로 봉수산의 맥을 이은 마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오른쪽으로는 복룡 마을로 이어지는 마갈 잔등이 있다. 바다 건너에는 압해대교와 유달산이 보이며 마을의 좌향은 서향을 하고 있다. 마갈과 장안두 마을을 이어주던 앞산의 능선은 현재는 완만한 평지로 바뀌어져 있다. 10여년 전에 토석 채취로 깎아 내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낸 흙들은 남악신도시개발에 투입되었다.

이 마을의 지형은 渴馬飮水형으로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이다. 대체로 이러한 지형은 명당이 숨어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이런 지명이 많이 있다. 그런데 주민들은 현재 풍수적 지형에 따른 지명을 사용하지 않고 칡 갈(葛)을 사용해 馬葛로 쓰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이렇게 변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말이 목이 말라 죽었다는 속설 때문에 그러지 않았는가 여기고 있다. 마을유래지에도 ‘말이 목이 마른 형국의 馬渴로 부르다가 해방 이후 칡이 많다 하여 馬葛로 고쳐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전주이씨다. 족보를 확인하지 못해 언제 누가 이 마을로 왔는지 적시할 수는 없으나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옆 마을 금동에 살던 이씨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고 여기고 있다. 처음엔 진씨들이 살았다 하나 후손들이 이어지지 않아 지금은 흔적이 없다.

마을유래지에는 ‘입향조는 愼씨 신상선이 200여년 전에 들어와 딸 만 둘을 낳아 출가 시킨 후 단절이 되었으며 이어 김해김씨 김문국이 영암에서 이주하여 왔으나 아들 둘이 나병 환자로 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성씨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헌을 통해서 이 마을 지명의 기록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마동만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왕산리 馬葛리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는 다시 馬渴로 나온다. 이로 보았을 때 마을의 형성도 조선조 말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부촌의 희망을 안고 있는 마을

▲ 마갈마을 앞 바다
이 마을은 장안두 마갈 그리고 새로 조성된 전원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전원마을은 10여 년 전에 마을 옆 경치가 좋은 곳에 택지를 조성하여 외지 사람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이 마을은 주변 마을과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우선 지하수 개발이 잘 되었다. 마을 어디를 파도 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또한 4-50년 전에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휩쓴 적이 있었다. 이 전염병으로 인해 주변 마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쑥대밭이 되어 가는데 이 마을만은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마을의 지형이 협소하여 농지가 적었다. 특히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물이 없어 하늘만 바라보았던 관계로 어렵게 살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시절이 바뀌어 수산물이 각광을 받으면서 주민들의 소득원이 달라져 이제는 부촌의 꿈을 실현시켜 가고 있다. 이 마을과 금동에서 생산되었던 금동 마갈 감태는 목포에서 가장 즐겨 찾는 해산물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물길의 변화와 오염으로 채취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노지에서 재배한 딸기가 주민들의 주된 소득원이 된 적도 있었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 주민들이 새벽에 딸기를 따서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목포에 가서 팔기도 하였다. 근래에 들어서 마을 앞 바다에서 많이 채취하는 굴과 낙지는 시세도 좋아 주민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해가 없었다. 대체로 해변가의 마을은 혼란기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 마을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 해안가엔 그 당시 인민군을 방어하기 위해 파 놓은 참호들이 남아있다.

마을 앞에는 네 개의 섬이 있다. 지금은 무인도이지만 예전에는 소섬과 중섬에는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 때 간첩 출몰이 예상된다 하여 육지로 이주시킨 뒤 현재까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소섬(쇠섬이라 부르기도 함)에는 부녀지간 또는 모녀지간의 상서롭지 못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요즈음 마을 주민들에게 현안이 하나 있다. 옆 마을인 마동 마을에다 목포시에서 도축장을 건설한다는 것인데 주민들 모두가 건설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도축장이 들어서면 황금어장이던 마을 앞 바다가 황폐화 되어 낙지는 물론 석화도 채취할 수가 없어 주민들에게 큰 손실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마동 마을 쪽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감나뭇골이 있으며 닭섬개 몰산개 지사개 농어개 숭어개 뻘쩍개 대만들 등의 지명이 있다. 말이 높은 고개를 오를 때면 숨이 차고 목이 말라 그때 지르는 소리가 호웃 호웃하며 숨 가빠하는데 그 음을 따서 붙인 이름인 호웃재가 있다. 마을에서 금동으로 넘어가는 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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