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가는 농촌의 용꼬리 마을
운남면 동암5리 용동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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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가는 농촌의 용꼬리 마을
운남면 동암5리 용동 마을
  • 백창석 소장
  • 승인 2012.08.01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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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巖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3,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다. 동암 신기 죽산 영해 용동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진 동암리는 원래 무안군 현화면의 지역으로 큰 바위가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암이라 부른다.

하지만 또 다른 "東巖"의 지명 유래는 1874년, 사도세자 사당을 세우고 사당 이름을 마을 동쪽 바위산 위에 있다 하여 "東巖廟"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호구총수에는 전좌리 하전좌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전좌리는 민촌을 말하는데 지역의 주민들은 전좌리라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무안군 현화면 동암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리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을 합하여 망운면 동암리 묶여졌다. 이후 1983년 망운면과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가 되었다. 원동암 마을에 사도세자 사당이 있으며 죽산 마을은 목포 보현정사의 스님인 정각스님의 태생지이다.

▲▲ 용동마을 전경

▲용꼬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용동은 동암5리에 속한 마을로 10여년 전에 원동암에서 분리되었다. 궁게들을 중심으로 탑동 새터 용동 마을로 이루어졌다. 탑동은 용동 마을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 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골이라 불려졌다. 새터는 새로 조성된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용동은 용골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형이 용꼬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용꼴에서 용골로 그리고 현재의 용동으로 불린 것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원동암 마을과 같은 김해김씨 김준희다. 얼마 전에 원동암 마을과 분리되었고 지금도 마을에 김해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입향조인 김준희 공은 선조 대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산강변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왜구를 토벌한다 하여 관군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이를 피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온 곳이 이 마을이다.

마을에 있는 용동 잔등은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잔등은 쪽두리 잔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 늦게 마을로 들어오는 배들에게는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을 앞 청계만은 얼마 전까지 황금어장이었다. 석화를 비롯하여 낙지 오징어 숭어 등이 이른바 고기반 물반으로 잡혀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안겨줬다. 또한 마을 앞에 송림이 우거진 1200여평의 동산이 있어 바닷고기들이 산란하고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고기 잡는 철이 되면 이런 수산물을 상대로 파시가 형성되었고 많은 사람의 왕래가 있었다.

하지만 톱머리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물길이 바뀌고 이어 농장과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바닷물이 오염 되었다. 해서 그렇게 많이 잡히던 고기와 그들의 서식지였던 뻘밭은 모래와 자갈로 황폐화되어 버렸다. 예전의 황금어장의 소멸은 물론 덤으로 물이 썩어가는 냄새까지 주민들은 맡아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만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대책위를 구성해서 어민들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전자리란 파시가 열렸던 자리를 말해

예전에는 이 마을에서 청계만 건너 도대 마을까지 이어지는 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로 인하여 波市가 이루어졌는데 이 파시로 인하여 전자리란 지명이 생기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전자리"란 田(물때 따라 물가 교통 요지에 열리던 임시 저자)이 섰던 자리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제 쪽의 어촌에서는 파시가 열렸던 전막금이란 지명이 많이 있다. 또한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 하루에 한 번씩 목포와 연결해 주는 여객선 ‘진경호’가 다니는 포구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에 있는 궁게들은 운남에서 제일 먼저 침수되는 수해 지구였다. 해서 조금만 비가 와도 주민들이 불안해 했는데 현재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궁게는 ‘궁-구멍’을 파고 사는 "게"이니, "궁게들"이란 게 구멍에 게의 종류인 "서른기, 농기, 갈기"가 들판 곡식처럼 널려 있는 갯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뻘이 일제강점기 때 간척이 이루어지고 용동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주민들에게 옥답으로 바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운남면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운남과 망운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운남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피해가 적었다. 주민들이 서로 보호해 주고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2명인데 경찰 출신과 면사무소 직원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주민 중 4명이나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다.

이 마을은 농사를 짓는데 선도 농가였다. 주민들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효과적인 농산물을 생산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예전에는 고추와 담배 농사가 주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양파와 마늘이 주된 농사이나 면적당 수확량이 다른 마을에 비해서 높기도 하다. 또한 다양한 계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어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문화유적 자료조사에서 이 마을 저온창고 뒤편에 있는 구릉에서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유물은 회흑색연질토기에서 구연부에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는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똑똑골 어장골 시망등 동산길 초분골 정기밑에 해지기 잔등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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