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간의 이해와 협조가 잘 이루어지는 마을

松亭里는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서해바다가 남으로는 망운면 목서리와 접해 있다.

본래 목포부의 망운면 지역으로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松亭'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망운면의 송정과 현경면의 상수장을 병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수장에 동학군 토벌대 묘가 있으며 하수장에 일제강점기 때 만든 비행기 격납고 1기가 있다.

▲ 하수장 마을 전경



▲물길이 좋아 붙여진 이름

하수장은 송정1리에 속하는 마을로 水長이라 불렸다. 그러다 1970년대 24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상수장 하수장으로 分里가 되었다. 지형적으로 국도변 아래에 있다 해서 하수장이라 하고 상수장은 위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다경면 松丁리로 나오는데 1912년의 자료에는 다경면 상수장으로만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현경면 松亭리 산하에 다경면 상수장과 망운면 송정리가 포함되었다. 이때까지도 하수장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후에 현재의 지명인 하수장과 상수장이 나온다.

수장이란 지명의 유래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단지 물길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 같다"고 말한다. 마을유래지에서도"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물의 양이 풍부하여 수장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지로 상수장의 독샘과 하수장의 줄샘은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장이란 지명에 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봤을 때 노루가 졸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도덕산이 노루머리에, 교회가 노루목에, 안산이 노루 뒷다리에 해당되어 한자로 표현하면 睡獐(수장)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수장은 포함이 안 되어 조금은 이해가 어렵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우경(자-이신, 1505-?)이다. 벼슬은 장사랑(조선 시대, 從九品의 문관 품계)이었으나 학문은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족보에"文學鳴世-학문으로 세상을 울린다"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공은 나주 세지면에서 세거하다가 조정이 어지럽고 群賢이 화를 입으니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은 耕讀 두 글자로 집안의 준칙으로 삼고 후세의 교육에 힘썼다.

또 다른 입향조는 창령조씨 조익진(자-광지, 1796-1870)이다. 공은 나주 적량면 대명동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들어왔다. 공은 공명을 일삼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 마을은 24번 국도가 뒤를 받쳐주고 오른쪽으로는 도덕산이 왼쪽으로 안산이 마을을 감싸면서 탄도만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예전 마을 주변에 송림이 우거지고 개발이 되지 않았을 때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좋은 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을 뒤 24번 국도인 현해로는 속칭 살인도로였다. 수십 명의 송정리 마을 주민들이 길 위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해서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교통안전공단과 교통안전에 관한 협약을 맺기도 했다. 또한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에는 공포의 길이기도 하였다. 해제와 지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처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지나게 되는데 송림이 우거져 있어 낮에도 무서운 길이었다. 해서 무리를 지어서 가지 않고 지나갔다가는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하수장 마을 앞 엄섬과 대섬


▲주민들 간의 이해와 협조가 잘 이루어지는 마을

마을에 줄샘과 통샘이라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 줄샘은 당산거리에 있는 샘인데 그 물이 맑고 좋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줄샘의 물로 주민들의 식용과 농업용수를 모두 해결했는데 샘 속에서 자라는 수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지하수 개발로 물이 예전처럼 나오지 않는다.

줄생 옆에는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소나무가 있었다. 수령으로 봤을 때 입향조가 심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나무인데 당산제를 지내기도 해 샘 주변을 당산거리라 불렀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줄샘 위쪽에는 세앙산이라 부르는 김해김씨 선산이 있다. 이곳에는 수령이 백년이 넘었을 10그루 이상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예전에는 더 많은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격납고가 있다. 원래는 두 개가 있었으나 하나는 밭 주인이 깨버려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또한 망운초등학교 뒤와 해동 마을 뒤에도 격납고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마을의 격납고만 남아있다. 이처럼 이 마을 주변에 4개의 격납고가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 가당골에서 현경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임시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격납고가 있었던 곳에 1990년대 중반까지 격납고 감시초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 주변에는 뽕나무 밭이 많이 있었다. 해서 마을에는 제법 규모가 큰 잠실이 있었으며 잠실에는 일본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마을 앞 탄도만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작은 섬은 엄섬(漁隱島가 줄어서 엄도가 되었다)이고 큰 섬은 대섬[竹島]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석화조합을 중심으로 큰 소득을 올렸다. 가을에는 앞바다에 솔가지와 큰 돌을 넣는 것이 주민들의 일과이기도 했다. 석화 성수기에는 한 사람이 12근에서 15근까지 채취하여 보릿고개를 넘기는 좋은 소득원이 되었다.

이 마을은 드물게 주민들 간 이해와 협조가 잘 되는 마을이다. 여러 성 받이가 살고 있음에도 마을 일에는 잡음이 없고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타성받이가 들어와 살아도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토박이 주민들보다 더 잘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이념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여건이었는데도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바람에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다. 그 당시에 주민 중 한사람은 인민위원회 현경면 분주소의 소장이어서 우익과 좌익의 대립이 첨예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기가 일찍 들어왔다. 해방 이후 바로 전기가 들어왔는데 망운과 현경면에서는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마을이었다. 마을에 간척으로 조성된 공동 재산이 있었는데 그 재산을 이용해 전기를 끌어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제에 살던 어떤 주민은 이 마을에서 전깃불을 처음 보고는 담뱃불을 붙이려고 까지 했다는 우스갯 소리가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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