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斜川里는 몽탄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초등학교 등 면단위 공공기관이 들어서 있으며 만복동과 봉서동 앞으로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무안군 박곡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림동, 간기곡리, 매곡리, 월천, 우적동 등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만복동, 사내, 봉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사천리는 모래내[沙川里]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천리 관련 자료들을 조사해 보니 빗기내 즉 斜川里로 써야 맞는 표기다.

여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하천을 비껴서 자리 잡았다. 두 번째는 사내 마을 입향조의 호가 마을의 이름을 딴 斜川이다.

세 번째는 마을에 있는 나주정씨 재각인 수재정의 현판에도 빗기내[斜川]로 나온다. 네 번째 이유는 1789년에 나온 자료인 호구총수에 박곡면 斜川里로 나온다. 현재의 沙川里란 표기는 일제강점기 때 바뀌어진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많은 복이 깃들어 번창해질 마을
만복동은 사천1리 마을로 건지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룡동과 만복동으로 이루어졌다. 구산리 유곡 마을과 함께 몽탄면 소재지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가운데로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계룡동 지명은 건지봉에서 등잔걸이를 지나 계서등으로 뻗어 내린 맥이 닭의 형상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또한 만복동은 마을유래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많은 복이 깃들어 번창하고 생기를 잃지 않는 마을’이 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민들은 언젠가는 이 마을에 만석군의 부자가 들어설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수천석의 양곡을 저장하는 농협 창고가 들어서 있어 이름값을 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무렵에는 피난민촌이 되어 오갈 데 없는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현재도 한국전쟁 당시 지었던 집이 남아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만복동과 계룡동 이름은 호구총수나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 가서야 비로소 몽탄면 사천1리 만복동으로 나온다.

하지만 계룡동이란 지명은 계서등처럼 한번도 기록으로 나온 적이 없이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자리하고 있다. 만복동은 사천1리 전체를 나타내지만 실은 현재 면사무소 뒤쪽을 말한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150여년 전으로 보이며 입향조는 주민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창녕조씨이다.

조봉한 일가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오랫동안 이 마을에 거주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지금은 조씨들이 살고 있지 않다.

이어 하동정씨와 김해김씨 나주김씨 등이 들어와 살았다. 이후 1913년 몽탄역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마을 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개의 천주교와 2개 교회 있어
마을 뒷산에 등잔걸이[괘등-풍수에서 대체로 좋은 터로 본다]라는 지명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터가 있었던 자리로 주변이 모두 나주김씨 문중산이다.

등잔걸이라는 지명이 등잔 밑은 어둡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한때는 산 밑의 주민들이 어렵게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탄역 주변은 소쿠리 형으로 큰 부자는 나오지 않지만 그런대로 살만한 터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초등학교는 병아리터(닭)라 하고 면사무소는 문서터(두꺼비터라고도 한다)라 했으며 파출소 자리는 꾀고리터로 알려졌다. 

鷄棲등은 닭이 살고 있는 형국의 마을을 말한다. 마을 오른쪽의 몽탄초등학교가 닭의 형상으로 운동장에서 길을 향해 튀어나온 부분은 예전에 높이가 있는 언덕이었다.

해서 이 언덕 주변을 계서등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공공기관으로는 초등학교 면사무소 몽탄역 보건소 등이 있다.

또한 한 마을에 천주교회 그리고 한샘교회와 몽탄중앙교회 등 세 개의 교회가 있으며 향토식당인 안성식당도 있다.

몽탄초등학교는 1929년에 개교하였으며 몽탄면 유일한 초등학교이다. 면사무소는 석진면과 박곡면이 합쳐서 석곡면이 되었으며 1939년에 몽탄면으로 개칭되어 사무소와 함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13년에 개통된 몽탄역은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현재의 驛舍는 2001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예전 역전교회라고도 불려졌던 한샘교회 자리는 일제 강점기 때는 주재소 자리였다.

한샘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중앙교회는 구산리로 나갔다가 현재의 자리로 들어선 것이다.

마을 뒤에는 몽탄배수지가 있다. 

 

 

몽탄역 앞에 펼쳐진 들을 화장(배에서 밥을 짓는 일을 맡은 사람, 도자기 가마에 불을 때는 사람 등을 일컫는다)들이라 한다.

구산리에서는 화쟁이들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들에서 나온 흙으로 질 좋은 기와를 생산해 1960년대 70년대 몽탄기와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군데도 없다.

1970년대 이전에 없어진 몽탄 시장은 세 번이나 옮겼다. 처음에 장이 들어선 것은 현재의 조합 창고 자리이다.

그러다가 철도 아래로 옮겼으나 물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봉서동의 청다리 근처로 옮겼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아 다시 철도 아래로 옮겼다가 없어진 것이다. 

복합성씨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현안이 불거질 때 단합이 잘 된다. 조그만 이해관계로 다투다가도 마을 전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현안에는 하나같이 단합하여 해결한다.

아직까지는 주민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전쟁 때는 드물게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다.

마을 뒤에 나주김씨 제각이 있다. 현판은 없지만 1959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