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 당호마을 전경

몽탄면 당호1리 원당호 마을唐湖里는 몽탄면 소재지에서 일로로 가는 81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6㎞ 지점에서 영산강 쪽으로 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마을 주변에 널따란 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풍요로움과 광활함을 준다.

唐湖里는 몽탄면 소재지에서 일로로 가는 81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6㎞ 지점에서 영산강 쪽으로 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마을 주변에 널따란 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풍요로움과 광활함을 준다.

호구총수를 보면 박곡면 唐湖里와 鶴田洞 葛山里 新興洞으로,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서도 박곡면 唐湖洞과 葛山里 新興洞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을 이룬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 온 것과 주변에 호수가 있어서 唐湖라 했다는 설이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로읍 복룡촌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원당호 갈산 신흥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신흥동 마을에 나주임씨 제각인 취련당이 있다.

선산임씨 동족의 마을
唐湖의 지명 유래는 당나라와 관련이 있다. 마을유래지에도‘마을을 이룬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와서‘唐’자와 마을 앞으로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 해서‘湖’자를 써서‘唐湖’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오랜 옛날 마을이 형성될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와서 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보면 앞이 거대한 호수처럼 보일 수 있다.

해서 지명에‘湖’가 들어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나라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도 없는데‘唐’이 들어간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 학전동 마을 전경

鶴田洞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소쿠리 모양의 형국이다. 뒷산은 학머리와 날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집들이 마치 학의 알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뒷산 너머에는 학이 돌아온다는 일로읍 상신기리 환학동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선산임씨 林壹齡(자-경수, 호-월정. 1508-1588)이다. 공은 사마시에 합격해서 진위 현령을 역임한 선비다. 원래 영암 서호면에서 세거했으나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자손들이 번창할 수 있겠구나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유래지는 공의 아버지인 林遇利(자-문겸, 호-유재. 1476-1529)가 입향조라 하였으나 주민들은 아니라고 한다. 아들인 일령공이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영암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이 마을로 이장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공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발라 주변의 사표가 되었다. 또한 조선 왕조에서 그의 학행을 높이 사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은거하여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주변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칭찬이 자자해 숨은 선비라는 뜻으로‘逸士’라 불렀다고 한다.

문헌으로 살펴 본 마을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박곡면에 唐湖리와 鶴田리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당호리만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도 박곡면 당호동으로 나온다. 1987년에는 몽탄면 당호1리 당호 학전동으로 나오며 이후에는 계속 같은 지명으로 나온다.

당호는 학전동과 당호로 당호재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당호1리에 속한 마을이다. 모두 선산임씨 집성촌으로 당호가 큰집 학전동이 작은집의 마을이라고 한다. 해서 다른 성씨가 들어와 살기는 무척 어려웠다.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얼마 살지 못하고 이사해 버렸다고 한다.

이 마을도 영산강변의 다른 마을과 같이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매우 어렵게 살았다. 농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타러 간다는 놀이가 성했다
학전동 마을 옆에는 일제강점기 때 당호천을 막은 당호저수지가 있다. 당호천은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朴谷川 또는 破軍川이라 불렀다. 당호저수지는 소화7년(1932년)에 1차 완공하고 광복 이후 증축하였다.

이 저수지는 일로읍에 조성되어있는 영화농장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마을 앞으로 수로가 지나가지만 주민들은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해서 저수지 밑에 농지가 있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밭농사를 지어야 했다.

마을 앞으로는 얼마 전까지 호남선 열차가 지나갔다. 지리적으로도 마을 앞은 일로장으로 가는 길이 있어서 나주사람을 비롯한 몽탄 사람들은 대부분 이 길을 이용했다. 해서 주막이 있었는데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 마을은 농악마을이었다. 농악관련 각종 경연대회에서 늘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농악을 잘했다. 한때는 주변 마을 청년들이 농악을 배우러 다닐 정도였다. 마을에 장수노인이 많다. 몽탄면 제일의 장수노인인 100세 노인을 비롯하여 8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당호 마을 앞에 임봉령 효자각이 있다. 임봉령(자-인수, 호-망여. 1712-1798)은 선천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이 오랜 병고에 시달리자 겨울철인데도 찬물로 목욕하고 천지신명께 부친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래도 효험이 없자 단지를 하여 간호를 하자 꿈에 노인이 나타나 너의 부친은 너의 정성으로 인하여 15년은 더 살 것이라는 게시를 받았다. 게시대로 15년 후에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했으며 모친이 돌아가시자 또한 시묘살이를 했다.

                                         ▲ 당호마을 임봉령 효자각

이러한 효성이 널리 알려져 1950년에 효자각을 세웠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훨씬 이전에 세웠다고 한다. 효자각 안에 있는 비는 1987년에 세웠다. 당호 마을 입구에 임태호 공덕비와 학전동 마을의‘임효자부부쌍효기적비’의 비가 있다.

당호 학전동 두 마을이 큰집 작은집의 관계인데도 정월 보름이면 물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이른바 물타러 간다는 놀이인데 당호 샘과 학전동 샘 사이에서 서로 물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민속놀이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앞 주막거리를 텅텅머리라 했으며 그 앞 임씨들 선산에 딸린 밭을 소금밭이라 했다.

지리적으로 소금과 관련이 없을 곳에 소금밭이라고 한 이유는 예전에 그곳에는 메밀밭이 많이 있었다. 그 메밀꽃이 마치 소금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학전동의 뒷산을 뒷까끔이라 하고 상신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선바윗등이라 하며 그 밑을 어장밑이라고 한다.

어장밑이란 일본인들이 당호저수지 제방을 축조하기 위하여 여기에서 흙을 파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호제 아래를 성가렛들이라 했으며 도산들은 그 아래에 있다.

여시골과 고래답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명산리 도산 마을에 선산임씨 제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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